공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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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수(水天需) 괘와 뇌지예(雷地豫) 괘를 읽었습니다. '기다림'과 '환희(열광)'는 우리에게 참 친숙한 상황이나 정서들입니다. 기다림과 기쁨 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견인하는 중요한 동력들이 또 있을까 싶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이번에 읽은 두 괘는 각자의 삶의 면면들을 돌아보게 하면서 좀더 깊숙히 들어왔던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기다림의 상황에서 '음식연락(飮食宴樂)'하라는 대상전의 말씀은, 생에서 숱하게 만나는 기다림의 시간들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늘상 '막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적 약점 또는 고질적 습성들을 뼈아프게 들여다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예괘의 효사들에서 말하는 기쁨의 양상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상황이나 사건 변화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철저하게 대상의존적인 방식으로 밖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스스로 기쁨의 원천이 되어 많은 벗들을 즐겁게 하는 구사효의 모습은 또 얼마나 늠름하게 다가왔던지요. 그러고 보면, 이 두 괘는 공히 구체적인 일상 가운데서 강건한 양의 덕성이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지고 길러져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듯합니다. 험난함을 앞에 두고 조급함 없는 항상심으로 그것과 더불며 즐길 수 있는 것도, 타자를 의심하지 않고 성신(誠信)의 마음으로 받아들여 기쁨의 공동체를 일구어 내는 것 모두가 양적인 역량 덕분임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음유의 힘으로는 기다림도 기쁨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기다림과 환희에 요구되는 강건함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물론, 이는 관계성의 역량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 괘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주역만큼은 독고다이로 공부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네요.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끌어올려주겠다는 마음들을 더 내보면 좋겠습니다(^^).
- 우선 수(需) 괘를 이야기해보면, 수(需) 괘는 ‘기다림’을 의미하는 때입니다. 저희는 수(需) 괘의 ‘기다림’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수(需) 괘의 형태를 보면, 건(乾)이 아래에 있고, 감(坎)이 위에 있습니다. 건(乾)은 강건한 성질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위에서 감(坎)의 험난한 성질이 가로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한 형태로 봤을 때, 수(需) 괘의 ‘기다림’은 강건하게 행하는 과정에서 ‘험난함’을 만나 잠시 정체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따르면, 이러한 ‘기다림’의 때에 중요한 것은 유부(有孚)의 태도입니다. 이는 믿음(信)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저희는 이 믿음(信)이 어떤 태도인지에 대해 주로 토론했습니다. 믿는다는 건 대체 무엇이고, 어찌 가능할까요?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음(信)은 개인의 다짐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게 아닐까요? 건(乾)의 강건함은 단순히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운동처럼 “변화에 응하여 무궁무진”(應化无窮)하는 것입니다. 즉, 강건함은 무수히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변형하며, 변함없이 운동하는 힘입니다. 이처럼 믿음(信)을 관계 속에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 그리고 변함없이 자기를 끌고 가는 힘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대상전에 군자가 기다림의 때에 음식연락(飮食宴樂) 하는 것도, 강건함의 역량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또 예(豫) 괘를 공부했습니다. 예(豫) 괘는 편안함과 즐거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희는 예(豫) 괘의 즐거움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즐거움의 감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괘의 덕을 보면, 외괘는 진(震)으로 움직임(動)을 의미하고, 내괘는 곤(坤)으로 순응함(順)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豫) 괘의 편안함과 즐거움은 순응하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편안함과 즐거움의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豫) 괘의 때에는 ‘무엇에 순응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응하는 것인가? 어떤 신앙에 순응하는 것인가? 주역에 따르면 둘 다 아닙니다. 예(豫) 괘에서 말하는 순응은 해와 달, 사시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이동하듯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사로 보면, 형벌의 예시가 등장하는데요. 여기서 형벌의 엄격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형벌을 깨끗하게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게 특이한 지점입니다. 형벌이 깨끗하게 행해져야 함은 형벌이 합당한 이치에 맞게 행해져야 함을 뜻합니다. 즉, 합당한 이치에 순응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형벌의 예를 들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예(豫) 괘의 편안함과 즐거움은 합당한 법칙을 따르는 데서 온다는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 수천수괘와 뇌지예괘를 공부하며, 두 괘의 공통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역에서는 기쁨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수천수는 믿음(信) 때문에 기다릴 수 있다는데, 그 믿음이란 무엇인지? 무리가 모두 즐거워하는 것과 기쁨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의 질문과함께 했습니다. 우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이란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쁨을 그저 내 배가 부르고 등 따뜻한 상황으로 좁게 보는데, 그래서 인지 수괘에 나오는 ‘음식연락’은 그렇게 오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괘는 믿음을 가지고서 때를 기다리는 그 과정이 형통하여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하괘인 건괘는 앞에 험난함이 있으니 본래 자질처럼 강건하게 나아가질 못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나아갈 수 있거나 뜻대로 못 나가더라도 각 효사 속 상황- 모래, 진흙, 피, 음식- 처럼 그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편안히 거(居 )할 수 있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괘가 말하는 믿음이란 현재가 영원하지도 붙잡을 수도 없다는 변화에 대한 믿음인지도 모릅니다. 예괘는 기쁨이란 무리가 함께 하는 것 (衆皆說豫) 이라고 합니다. 유일한 양효인 구사효가 음의 자리에 거하여 순하게 동(動)하고 있기에 나머지 음효가 모두 벗이 되어 모입니다. 이것은 마치 해와 달, 사시(四時)처럼 편안하게 운동하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기쁨은 공유 와 연결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도한 기쁨은 경계해야 하는데, 혹시나 그것이 빈자에 기댄 부자의 기쁨처럼 누군가의 어려움에 기댄 기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고 보니 채운 샘 강의가 있었네요. 최근에 일어난 청년들의 묻지마 살인이 과연 나와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는 온갖 사회 문제들이 나의 책임이라는 의식에 바탕해 각자의 구체적인 삶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오직 가족과 화폐에 고인 자본주의적 운동 속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욕망을 물처럼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 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같은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조별 텍스트들에서 말하는 주체화나 양생, 쾌락 같은 개념들을 재사유하고 이를 다시 주역의 괘와 결합해 보라는 요구가 있었지요. 다들 잘 새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 4차시에는 산화비와 택수곤 괘를 읽습니다. 6효의 음양이 모두 뒤바뀐(全變), 배합의 관계에 있는 괘들입니다. 서로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괘는 그야말로 상반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지점 또한 눈여겨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간식은 지영샘과 혜원샘입니다. 일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