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택화혁(澤火革 ䷰)과 화풍정(火風鼎 ䷱)입니다. 둘 다 특정한 사물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혁(革)은 가죽, 정(鼎)은 세발솥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우리는 혁과 정을 가죽과 세발솥으로 바로 읽지 않습니다. 혁명과, 혁명 이후의 통합 과정으로 읽지요. 혁명이라는 말은 유독 비일상적입니다. 든 순간에 64괘가 있다고 하는데, 혁명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죠. 왜냐하면 혁명이란 기존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굉장히 특수한 경우에만 펼쳐질 것 같거든요. 게다가 역(易)이란 그 자체로 변화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변화’라는 뜻의 혁(革)은 그중에서도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집니다.
혁(革): 하늘에 순하고 사람에 응하라
혁괘 단전에는 명(命)을 바꾼다는 뜻의 혁명(革命)이 있습니다. 우리가 ‘혁명’이라고 하는 말의 출전은 <주역>의 혁괘였던 것이죠. ‘가죽을 뒤집는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한 체제가 전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혁명. 그 단적인 예는 탕왕과 무왕입니다. 탕왕과 무왕은 왕조교체를 무력으로 이룩했습니다. 그 혁명의 시간에는 신하가 임금을 공격해서는 안 되고, 죽여서는 안 된다는 질서가 뒤집어졌죠. 그렇다면 혁명이란 기존의 질서가 교란되는 때일까요? 그런데 <주역>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윤리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펼쳐집니다. 탕왕과 무왕이 신하로서 드록 일어나는 것과, 천지(天地)가 혁(革)하여 사시(四時)가 이루어지는 것은 둘 다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쪽은 인위적이고 질서를 어지르는 일이고, 다른 한쪽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변화의 양상이 얼마나 다양하지 못한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혁(革)도 정(鼎)도 다양한 변화의 양상 중 하나라고 본다면, ‘변화[易]에서 왜 또 변화[革]를 말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는 거죠.
혁괘의 괘사는 "하루가 지나야 믿게 된다[己日乃孚]"입니다. 우리는 혁명 하면 하루 아침에 뒤집혀지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갑자기 여름이나 가을이 성큼 오는 것 같지만, 사실 자연의 차원에서 보면 혁(革)이란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과정을 미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변혁을 늘 갑작스럽게 겪곤 하죠. 이 변혁을 믿고 받아들이기 위한 시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택화혁(澤火革)은 물과 불이 서로를 식(息)하는 관계라고 합니다. 식(息)이라는 글자가 재밌는 것 같습니다. ‘숨쉬다’라는 의미의 이 글자는 종식의 의미이기도 하고 생식의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이천이 여기에 착안해 ‘그침[止]’이자 ‘생겨남[生息]’이라는 해석을 달았죠. 이는 변혁이란 더 강한 힘에 동화되는 것이 아닌, 기존의 전복과 새로운 힘의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언듯 보면 변혁의 시간은 더 강력한 누군가가기존의 체제를 압도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역>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변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힘과 힘이 싸우다가 어느 한쪽이 다른쪽을 동화시켜 버린 것이죠. 혁(革)은 합(合)이 아니라 충돌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렇게 한번 깨진 질서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이죠.
이런 혁(革) 개념은 서양의 revolution과 바로 대응되진 않습니다. 레볼루션은 회전을 의미하는 라틴어 revolutio를 어원으로 합니다. 이제까지 있어왔던 힘의 반전, 혹은 회전하는 힘으로 모든 것을 뒤집고 섞어버리는 이미지가 있지요. 그런데 혁(革)괘는 문명함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반전, 혹은 카오스 상태는 아니에요. 오히려 하늘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응해야 합니다. 이를 단전에서는 순호천이응호인(順乎天而應乎人)이라고 했습니다. 혁명 하면 핍박받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분노로 떨쳐 일어나는 것을 연상하곤 합니다만, 사실 내적으로 분명한 비전과 통찰력이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그걸 호응하고 지지해주는 환경이 맞아 떨어져야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鼎): 혁명 이후
정(鼎)괘는 이런 혁명의 시간 이후 어떻게 다시 통합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역사적으로 역성혁명이 계속 있어왔습니다만, 사실 끝은 별로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혁명이 끝났다 싶으면 이제 지난한 논공행상과, 혁명시에는 영웅시되던 사람들이 반도가 되는 일들이 반드시 일어났죠. 혁명 이후를 직시하면, 혁명이라는 것을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아름답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진보를 위한 혁명이라는 것은 사실 <주역>에 없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그에 걸맞는 태도가 있을뿐이죠.
정괘는 솥단지 모양을 연상케 하는 괘입니다. 솥 다리와, 내용물을 담는 부분과, 고리처럼 생겼...다고 하죠?^^ 세발솥은 가장 귀하게 대접받는 제기였습니다. 그리고 요소 하나하나가 많은 사람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구였죠. 지금처럼 불순물을 제대로 걸러내기 어려웠던 고대에 깨지지 않으면서도 커다란 청동세발솥을 만든다는 건, 그야말로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관리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효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리가 부러져버립니다. 그렇기에 솥의 크기나 무늬의 디테일은 권력자의 권위 그 자체를 상징했죠. 이런 큰 솥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 정도면, 혁명의 시간에 한번 해체되었던 사회질서가 다시 조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상전에서는 이를 정위응명(正位凝命)이라고 합니다. 각자의 자리를 바르게 배분하고 명을 응집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 명(命)이란 뭘까요? 혁명에서도 변혁하는 것은 결국 명(命)이었습니다. 보통 천명(天命)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럼 또 천명을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많을 것 같습니다만, 일단 민심(民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변혁을 이루겠다 마음 먹어도, 그리고 변혁을 이루었다 해도 사람들이 그에 따르지 않으면 변혁도 그리고 그 이후의 질서도 성립될 수 없죠. 인간의 문제는 결국 어떤 사회를 만드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고, 그때 중요한 건 사람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정(鼎)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가장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만들려면 협력이 필요하고, 함께 요리를 해서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는 도구이고, 마음을 모아 상제에게 제사지내는 도구이기도 했으니까요. 이를 통해 군자는 다른 사람을 기르고, 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기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도구이기도 하니까요. 그야말로 응(凝)할 수 있는 시간이 정(鼎)의 시간인 것입니다.
혁명은 결국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미덥지 못할 때 변혁은 일어나지 않고 혼란만 가중되지요. 노자는 그 미더움이 극한일 때 백성들은 무슨 변화가 일어난 줄도 모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좋은 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謂我自然]고 믿는 것이고요. 거꾸로 말하면 세상과 사회에 대한 믿음이 없을 시 그 사회를 지탱하는 믿음도 부족하게 된다고[信不足焉 有不信焉] 여러번 말하곤 합니다. 이런 노자의 말은 변혁이라는 말이 주는 어딘가 통쾌해(?) 보이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혁명이 곧 진보라는 믿음은, 사실 큰 불신을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