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산수몽(山水蒙 ䷃) 산뢰이(山雷頤 ䷚)입니다. 몽매함을 뜻하는 몽괘는 교육에 대한 괘, 먹인다는 뜻의 이괘는 기름에 대한 괘입니다. 둘 다 양육의 괘라 할 수 있지요. 지금 교육이나 양육은 곧장 아이를 기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양육, 하면 바로 육아를 떠올리거나 교육, 하면 십대 청소년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떠올리지요. 둘 다 미성숙한 자를 성숙한 자가 이끌어주는 일방향적인 구도를 그리곤 합니다. 그러다보면 교육자나 양육자의 헌신, 희생을 강조하기도 하지요. 그 헌신과 희생은 미래라는 불명확한 시간을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고요. 하지만 몽괘와 이괘의 특징은 교육과 기름이 단지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퍼주거나 희생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몽괘는 배우는 자의 능동성을, 이괘는 자신을 기름이 남을 기르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주역>에 없는 것입니다.
몽(蒙), 배우는 자의 능동성
몽괘는 산 아래로 샘물이 나오는[山下出泉] 상입니다. 이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몽매한 상태에 있지요. 어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배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배움은 많은 것을 알고 지식을 쌓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몽괘는 말합니다. 배움이란 배우는 자의 능동적이고 과단함이 필요하다고. 그걸 잘 보여주는 게 괘사입니다. 괘사는 가르치는 자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동몽(童蒙)'이 있고 그런 동몽을 가르치는 '나[我]'가 있지요. 괘사는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함이니, 처음 묻거든 고해주고 두 번 세 번 물으면 번독하다. 번독하면 고해주지 말 것이니, 정(貞)함이 이롭다.[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입니다. 서(筮)는 점을 치는 것으로 결단을 위한 도구입니다. 점을 칠 때는 그 결과에 따르기로 각오하고 점을 쳐야 한다고 하죠. 그만큼 배우는 사람은 절실함을 가지고 배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모독[瀆]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독(瀆)이라는 건 뭘까요? 가르치는 사람이 모독을 당했다고 느끼는 걸까요? 그렇게 되면 몽괘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의 질문을 막는, 비정한 스승이 되고 맙니다. 물론 절실함 없이 자꾸 물어만 보고 있으면 그걸 적절히 단속해 주는 것도 스승의 역할이겠죠. 하지만 몽괘가 두 번 세 번 질문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만큼 번다해지기 때문입니다.
왕필은 점을 쳐주는 자와 그걸 필요로 하는 자로 몽괘의 상황을 해석합니다. 몽매한 자가 결단을 필요로 해서 점을 쳐서 알려주는데, 여러 번 점을 칠 경우 몽매한 자를 어지럽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죠. 처음 솟은 샘물이 길을 구할 때, 가르침을 구하고 결단하는 것을 돕기 위해선 스승 또한 몽매한 자가 따를만한 위엄을 갖추어야 합니다. 단지 배우는 자의 절실함 만으로는 몽이 격파되진 않는 겁니다.
단전에서는 몽괘에서 성인의 공이란 바름을 기르는 것[養正]이라 합니다. 이 '양정'을, 몽매한 이의 바름을 기른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와 스승의 구도로 본 정이천은 그렇게 해석을 했죠. 그런데 왕필의 해석을 받아 공영달은 독특하게도 몽매함을 통해 성인이 바름을 기른다고 해석합니다. 몽의 상황은 앞은 막힘[艮], 뒤는 험함[坎]인데, 이때 양강함으로 상징되는 성인은 음유함으로 상징되는 몽매한 자들과 마주치면서 이 상황을 타파해 나간다는 것이죠. 앞뒤로 막히고 험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고 가능성을 열어야 할 때, 교육은 가장 능동적인 활동이 될 수 있는 거죠. 이럴 때 몽괘는 몽매한 자가 배움이 절실한만큼, 가르치는 자 역시 배움을 구하는 적극성을 필요로 하고 권유할 필요가 생깁니다.
이(頤), 너를 기르고 나를 기르다
이괘는 괘 모양을 보면 먹는 입이 떠오릅니다. 초효와 상효는 턱, 그 사이의 음효들은 그 사이에서 씹히는 음식물 같죠. 먹어서 배양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이괘입니다.
정이천은 이 입이 먹고 마셔서 몸을 기르는 곳이므로 '기름'이라고 했다고 해석합니다. 새삼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고 영양분을 공급하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우리 몸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이괘는 먹는다는 행위를 적극 도입해 '기름'을 해석합니다. 배양하고 기른다는 것은 결국 나 아닌 다른 것을 먹고 소화해야 가능합니다. 타자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인 거지요. 때문에 괘사는 다른 이의 배양과 나의 배양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괘사는 이렇습니다. "배양은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니, 타인이 배양하는 것과 스스로 음식을 구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頤, 貞吉, 觀頤, 自求口實]." 이는 나를 기르기 위해서는 타자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배양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보여줍니다. 나 혼자 잘 먹는다고 배양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괘에서도 양정(養正)이 나옵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이 양정이란 현자를 기르는 것과 자신의 덕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천지가 만물을 기르듯 성인이 현자를 기르고 덕이 만민에게 미치는 확충의 구도를 보입니다. 천지가 만물을 기른다지만, 사실 만물은 천지와 구분되지 않지요. 천지의 바름은 만물을 통해서만 드러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인과 현자, 만민의 바름은 서로를 배양하는 안에서 드러날 뿐입니다. 때문에 '바르게 기른다'라고 하지 않고 '바름을 기른다'라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배양의 바름[正]이란 선험적이고 당위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죠. 개체는 공동체 없이 길러질 수 없지만, 공동체는 개체의 다양성을 떠나 존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이괘는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