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왔네요. 에세이도 고민하고, 과제도 고민하고, 고민할 게 투성입니다. 하지만 기왕 우리의 일상을 시답잖은 것들로 채우기보다 ‘나’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시간으로 채운다고 생각하면 좀 낫지 않나요? 아님 말구요. ㅋ
먼저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① 화지진괘(火地晉卦)ㆍ지풍승괘(地風升卦)를 공부합니다.
② 에세이 본론을 진행사시면 됩니다.
③ 간식은 현주쌤과 황리쌤께 부탁드립니다~
각 조별 토론 내용을 공유하기 전에, 간단하게 채운쌤께서 말씀하신 주의사항 몇 가지를 정리해볼게요.
일단, 괘를 해결의 도구로 가져오시면 안 됩니다.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소통이 되는 괘, 항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성을 말하는 괘를 가져오는 것은 주역의 적절한 활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괘를 가져오는 동안 문제는 너무 벙벙하게 진단되기 때문인데요. 채운쌤은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할 수 있다고 하셨죠. 우리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불통으로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 말을 원활하게 주고받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겪는 불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는 동안, 우리가 소통에 대한 어떤 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크게는 우리의 반(反)자연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데까지 규정해야겠죠? 괘를 가져오기 전에 이 작업을 충분히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단, 괘에 대해 좋다 혹은 나쁘다란 가치평가를 하시면 안 됩니다.
64괘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괘가 유독 길하거나 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안 좋은 상황으로 산지박괘(山地剝卦)가 자주 소환되곤 하는데요. 12소식괘(消息卦 : 12달을 음양이 차고 줄어드는 운동으로 12개의 괘로 표현)로 봤을 때는 9월, 그러니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 아니라 어떤 전환에 임박한 시기로 읽을 수도 있는 거죠. 하나의 괘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 좀 더 이리저리 고민하란 말씀이셨습니다. 괘를 가져올 때는 '경계해야 할 가르침'이나 '길(吉)로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사유'를 기준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의 길흉을 따질 때는 괘보다는 효사로 판단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특정한 관계 속에서 어떤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효사는 다른 효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효가 어떤 자릿값을 가지고 있는지,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의 괘를 이해하면서,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효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각자 에세이에 대해 코멘트해주신 게 있는데, 그건 조별로 얘기를 하시면서 소화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남은 시간도 열심히 철학해보죠~ @_@
희수조
몽괘와 이괘를 “양정(養正)”이란 키워드로 읽었습니다. 사실 몽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많이 해서 이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했습니다. ㅎㅎ;; 그러나 분명 다른 상황을 얘기하지만, 어쩐지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養), 무엇을 길러야 할 것인가(正)를 놓고 읽어보면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두 괘에서 얘기하는 ‘기름’은 기르는 자와 길러지는 자 모두를 능동적으로 만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몽괘는 가르치는 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배우는 자는 어떤 태도로 배움을 요청해야 하는가에 관한 괘입니다. 큰 의미는 배우는 자의 능동성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이 괘는 어디까지나 배우는 자의 능동성만을 강조한다고 읽어야 하는 것인가에 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칫 배우는 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면, 마치 배우는 자만 길러지고, 가르치는 자는 ‘기름’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호 기름의 관계는 이괘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몽괘의 맥락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는데요.
이에 대해 토론에서는 배우는 자를 가르치는 동안 가르치는 자 역시 길러진다고 얘기로 정리했습니다. 분명 배우는 자가 능동적으로 배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자의 능동적 가르침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배우는 자의 능동적 배움이 가르치는 자의 능동적 가르침을 촉발하는 것이라고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배우는 자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어떤 가르침이 내려져도 그것을 겸허하게 따르겠다는 결단 속에서 배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에게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지 심사숙고한 뒤에 한 번 가르칩니다. 공영달은 이 ‘한 번’을 상반된 가르침을 내려서 배우는 자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죠. 따라서 한 번의 가르침을 내리기 전에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만큼 무지를 경험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배우는 자에 의해 가르치는 자도 무지로 촉발된다는 점에서, 서로의 무지를 출발점으로 새로운 앎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둘 다 이 관계 안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정’을 ‘관계 안에서 서로의 윤리적 올바름이 확립된다’고 풀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正)보다 양(養)에 초점을 맞춰서 읽은 건데요. 장자의 양생(養生), 맹자의 양호연지기(養浩然之氣) 같은 걸 생각하면, 고대 중국에서 ‘양’이란 글자는 ‘성장’만이 아니라 ‘회복’ 혹은 ‘순환’의 뉘앙스를 내포합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개체에게 좋은 쪽으로 고른다기보다 개체에게 내재된 우주적 역량을 다시 북돋는 것에 가깝죠. 이렇게 보면, ‘양정’은 모든 존재에게 내재된 우주적 역량을 회복하는 것에 가깝고, 몽괘와 이괘에서 얘기됐다는 건, 관계 속에서 그런 작업을 수행한다고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토론에서는 ‘양정’의 실천을 고민하다가 학교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도 번져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 배움과 가르침, ‘기름’이 일어나는 장소인데, 현실적으로 그곳에서 ‘양정’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갑갑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배우는 자의 능동성”, “학생들에게 교과를 잘 전수하는 게 가르치는 자의 능동성”이라고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는 아직 ‘원자력 발전은 청정에너지다’ 같은 철 지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고, 푸코가 지적했듯이, 학교 교육은 정상적 신체를 훈육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이미 많은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셨듯이, 학교 시스템은 관료화된지 오래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열심히 할수록 배우는 자도, 가르치는 자도 역설적으로 능동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교육에서는 더 이상 ‘양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누군가는 그곳에서 ‘양정’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데,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양정’을 시도하겠다는 건 너무 도피적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혼란스러움에 휩싸인 채로 토론은 마무리됐습니다.
정랑조
이번주는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산수몽(蒙)괘와 기르고 양육하는 산뢰이(頤)괘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두 괘 모두 배움에 관한 괘들인데요.
그중 몽괘는 64괘에서 네 번째로 건곤 그리고 이 둘이 처음 만나 겪는 혼돈과 어려움의 둔괘 다음에 등장하는 괘입니다. 괘상도 아래에 험함, 빠짐을 뜻하는 감괘와 위에 산, 그침을 뜻하는 간괘가 놓여있어 물이 높고 험한 산을 만나 그치고 막혀 있는 형상이지요. 그래서 몽의 때는 어린 아이가 세상을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막막함을 마주한 때로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막혀 있고 답답한 때임에도 괘사에서 몽의 때는 형통할 수 있다(蒙 亨)고 단언합니다. 하괘의 감괘가 ‘험함, 빠짐’이기도 하지만 이효의 양강함은 동몽이 험함 속에서도 어떡하든 이리저리 스며들고 계속 흘러갈 수 있는 역량(호기심)이 있어 난관과 막힘을 뚫고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단전에서는 몽의 형통함을 ‘형통함으로써 행함이니 때에 맞다(蒙亨 以亨行 侍中也)’고 합니다. 그렇다고 동몽은 막막함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냥 되겠지, 누가 오겠지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이리저리 자신의 문제를 뚫고 갈 수 있는 양강한 스승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성이 필요합니다(非我求 童蒙 童蒙求我). 하지만 스승은 답답하다고 찾아온 동몽에게 자신이 안다고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동몽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큼만 동몽을 깨우쳐 주지요(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이것은 스승이 동몽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양강한 스승은 때를 알고, 동몽의 역량을 헤아리고 있어 동몽이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세 번 말해봐야 동몽의 혼미함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스승의 동몽을 교육하는 방식을 단전에서는 ‘어리석음으로써 바름을 기른다(蒙以養正)’고 합니다. 즉, 스승이 아무리 동몽이 모르는 밝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받아들일 수준이 안 된 자에게 좋은 것이니까 언제나 누구에나 좋다는 식으로 무조건 밀어 넣거나 어린 애가 답답해 하고 힘들여 찾는 것은 안타깝다며 잘 할 수 있는 내가 대신 한다는 식은 때를 읽는 바른 기름(養正)이 아니라고 봅니다. 즉, 몽매한 동몽을 몽매함으로 일깨우는 것은 때에 맞게 과감하게 일깨우되, 동시에 어떨 때는 동몽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가도 좌충우돌하면서 느리고 답답하지만 스스로 답을 구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겪을 수 있도록 스승은 옆에서 함께 있어 주며 묵묵히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 마음(包蒙)도 필요함을 ‘蒙以養正’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산뢰이괘는 괘상이 상괘는 산, 그침(止)을 상징하는 간괘가 아래에 우레, 강한 운동성을 상징하는 진괘가 있어서 움직임과 그침의 형상이 동시에 있습니다. 또한 맨 아래와 맨 위가 양효로 그 사이에 음효 네 개가 있어 마치 입안에 음식을 넣고 턱으로 씹고 있는 입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신체든 정신이든 태어났다면 그것을 키우고 자라게 하려면 음식이든 지식이든 외부의 것을 취하여 내부로 받아들여 이를 적절히 소화 시켜 자양분으로 삼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 양육의 때는 바르게 해야 길하다고 합니다(利貞吉). 바르게 기르고 양육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 같긴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바르게 기르려고 했는데도 결과가 그렇지 않게 되었을 뿐 처음부터 나쁘게 하려고 작정하고 기르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기르는 것이 바른지 막막한데요. 養正, 바름을 키우는 것을 ‘천지가 만물을 키우고 성인이 현자를 키워 만백성을 키우는 데 까지 이르는 것(天地養萬物 聖人養賢 以及萬民)’이라고 합니다.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길러내는 것은 때에 맞게 적절히 물과 햇빛을 주다가도 또 때가 되면 과감하게 시들어 죽게도 하면서 멈춤과 움직임을 지속하는 과정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괘에서는 필요한 것을 파악해서 적절히 넣고 멈추는 타이밍을 중요시 여깁니다(단전 頤之時 大矣哉).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보통 무엇을 기르고 키우는 것은 어렸을 때 하는 것이고 어른이 되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키워내는 것은 리듬에 따라 다른 기름을 하는 것이지 그 기름을 멈추지는 않죠. 그래서 괘사에서는 이런 천지가 만물을 길러내는 바른 기름을 잘 관찰하여 스스로 입에 들고 나는 것을 잘 살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름을 지속해가라고 합니다(觀頤 自求口實). 그리고 이런 태도는 자신의 기름을 외부에 도움을 주든 자신의 기름을 늘 신중히 살피고 때에 맞게 해가라는 당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름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척하니 의탁하려는 태도나(초구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턱을 축 늘어뜨리고 있으니 흉하다.’(舍爾靈龜 觀我朶頤 凶)) 나이가 들었다고 ‘나 이제 다 알아’라고 하며 주어진 대로만 살면서 기름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모두 경계합니다. 때에 따라 기름을 의탁하는 자든 기름을 주는 자든 범이 탐탐히 노려보듯 스스로 자신의 입과 마음을 실하게 하는 ‘호시탐탐(虎視眈眈)’의 태도를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황리조
배움을 말하는 대표적 두 괘라 할 수 있는 산수몽괘와 산뢰이괘를 읽고 토론하면서, 저희 조에서는 배움이라는 일의 관계성, 역동성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몽매한 자가 자신의 어두움을 떨치고자 하는 발심과 이를 끌어안아 기꺼이 깨트려주고 하는 자비의 마음이 만나야 진정 형통한 사태를 도래케 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방법론으로서의 ‘果行’의 중요성에 초점에 맞춰졌고요. 초심자에게나, 이를 바른 길로 안내하고자 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결단력’이라는 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세속화돼버린 요즘 같은 상황에선 참 생각해 보기 힘든 역량이라는 생각이 신선하게 다가오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제 자신부터가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의 ‘신성한 일회성’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겠다 싶었고요. 그리고 몽괘 단전에 나오는 ‘蒙以養正’에 대한 해석을 놓고도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갔네요. 정이천과 공영달의 해석 차이 때문인데요, 제 경우엔 공영달의 해석에 솔깃해서 ‘蒙’을 단순히 타파해야할 몽매의 상태가 아니라 무궁한 잠재성의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 해서 몽의 모순성과 그 양면성을 모두 볼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육오의 ‘동몽’과 구이의 ‘포몽’에서의 ‘몽’은 단순히 외부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에 지키고 받아들여 발양해야하는 미분화의 잠재력 같은 게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적어도 ‘노자’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산뢰이 괘에서는, 기르고 배양하는 일의 신체성 및 상호성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는데요, 먹어서 몸을 기르는 일이든 말로 주고받음으로써 정신을 배양하는 일이든 모두 입-기계의 작동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과 나의 배양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이 삶의 조건에 대한 관찰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산뢰이괘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물을 씹어 삼키든 말이나 생각을 곱씹든, 씹는다는 비근한 움직임이야말로 인간 삶과 관계의 밑절미를 이룬다는 것, 이를 상전에서 '신언어 절음식'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 한 마디만으로도 산뢰이괘는 늘 주머니 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하는 괘가 아닐 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효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이’, 즉 ‘전도된 배양’이 의미하는 바를 놓고 얘기를 꺼내긴 했는데, 충분히 진전된 것 같진 않네요. 자기 배양이든 타자 배양이든, 개인적 이든 지구적 차원이든 확실히 이 시대는 '전이-뒤집힌 배양'의 시대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