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화지진(火地晉, ䷢), 지풍승(地風升, ䷭)이었습니다. 에세이가 성큼 다가오고 있어서 길게 토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핵심적으로(!)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보려 합니다. 진괘와 승괘는 둘 다 나아감에 관한 괘입니다. 사실 진(晉), 승(升), 그리고 풍산점(風山漸)까지 세 개의 괘가 나아감, 올라감의 괘입니다. 다음 학기에 점괘를 읽게 되는데, 그때 다시 진괘와 승괘를 포함해 세 개의 괘를 비교해보면 좋겠네요(그건 다음 학기에~^^).
<주역>에서 나아감/상승함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의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나아감을 생각하면 발전을 떠올립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진보의 모습을요. 그럼 기존 상태를 치고 나가는 양강한 힘을 강조할 것 같지만, 진괘와 승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괘와 승괘의 공통점은 소성괘 곤(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전을 보면 진괘와 승괘는 모두 음유함의 나아감[柔進而上行], 음유함이 때에 따라 올라감[柔以時升]이라고 하며 유(柔)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주역>에서 상승은 양강함의 추진력도 중요하지만 그걸 수용하고 응하는 음유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진(晉)괘의 경우 지상 위에 태양이 떠올라 구석구석 사물을 밝히는 모습입니다. 상괘인 리(離)괘는 그 핵심에 음유함을 품고 있지요. 때문에 리괘는 어딘가에 영향을 미치는 밝음[明]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기 아닌 다른 것에 붙어있음[麗]을 필요로 합니다. 태양이 아무리 밝게 비춰도, 그 빛을 수용하는 지상의 응함이 있어야 리괘의 상행(上行)이 가능한 것입니다. 진보는 일방적으로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괘사는 번다하게 오고가는 군주와 신하의 모습을 그립니다. 진괘의 군주는 제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씩 접견하는 것[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을 마다하지 않지요.
승괘는 나무가 지상으로 자라는 모습입니다. 양강한 2, 3효가 중심이 되는 것 같지만, 결국 중심은 그걸 품어주고 자리를 내주는 토양과 만나는 때를 중시하죠. 그리고 승괘는 자라는 만큼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힘도 중요합니다. 때문에 아래에는 자신을 낮추는 손(巺)이 있습니다. 승괘의 이런 모습은 관계성을 의식하는 만큼 올라가는, 상승의 다른 이미지를 모여줍니다. 이런 승괘는 이제 막 시작하여 상승하려고 할수록 도움과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올라감, 진보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경쟁관계나 블루오션을 찾는 개척정신 같은 건 승괘에 없습니다. 괘사에서 말한대로, 대인을 만나되 근심하지 말고 크고 넓은 곳으로 가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길합니다[用見大人 勿恤 南征吉]. 대상전 식으로 말하자면 작은 것에서부터 다져나가는 "적소이고대(積小以高大)"의 자세가 필요한 겁니다.
진괘와 승괘 둘 다 나아감은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을 말합니다. 진괘에는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힌다[自昭明德]"라고 합니다. 왕필은 이를 유순함으로써 밝게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해석합니다. 한강백은 진괘 대상전을 보고 노자의 "스스로를 아는 자는 명석하다"를 인용합니다. 노자 33장입니다. 노자는 음유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렇지만 밝음을 강조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노자에 의하면 밝음은 자신이 놓인 관계에 대한 이해[自知]인 것이죠. 우리는 진보를 생각할 때 어떻게든 나 자신의 더 나아감을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유순함을 쓴다는 건 내가 놓인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곤(坤)이 그렇듯, 다양한 것들에 응하여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진보는 나의 더 나아감이 아닌, 지금의 나를 벗어나는, 변화의 역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