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철학 2-1주차 서양고대 팀 후기
2학기 서양 고대팀은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읽습니다. 1학기 소크라테스를 읽고 2학기 그리스 비극을 읽기로 한 프로그램을 조금 수정하였어요. 1학기 에세이를 쓰면서 주역을 고대철학으로 해석하기엔 좀 더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지요. 피에르 아도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철학사의 흐름이 조금 정리가 되겠지요?! 이번 시간엔 1부를 읽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간단히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토론에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에게 앎이란 당시 지식판매상이던 소피스트와는 다른 것이었죠.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으로 표현되듯 그에게 앎은 ‘무지를 깨닫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그는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퍼부으며 ‘진리를 낳게끔 도와주는’ ‘산파 역할’을 자처합니다. 진리는 찾는 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이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질문은 자신 안에서 ‘기억’을 되살려 무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자칫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자기 앎의 지반의 붕괴이자, 자신과의 거리두기이며 앎의 “불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이기도 했지요. 알지 못하는 ‘불가능성’의 문제는 버려두고 그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참여’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덕이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죠. 탁월성 곧 덕은 습관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가진 탁월함을 소유한 사람’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를 통해 그리는 철학자의 모습인 것 같아요.
토론에서 질문으로 나왔던 것 중에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동일한 것이 될까? 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준법이라고 해도 단순히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불의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의 목소리(우주적 질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다. 등등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뾰족한 답을 얻지는 못하고 계속 이 주제를 가져가 보자라고 탐구심을 살짝 내려놓았습니다.ㅎㅎ 그래도 자기 실천의 한계를 인식한 것이어서 주역을 공부하는데도 고대철학 공부에도 화두삼기에 좋은 주제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말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실천했는데요. 그에게 악은 ‘도덕적 과오’이고 선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이고 보면, 자신의 선을 행한 것이죠. 선한 사람은 정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불의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을 행위로 보인 것이죠. 소크라테스의 정의(正義)를 정의(定意)하기 참 어렵지만,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삶을 사는 실존 그 자체밖에 없다고 한 그의 말에 의지할 밖에요. 위 질문에 대해 아도가 소개하는 메를로 퐁디의 말을 재인용하며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준법은 저항의 한 방법이었다”. “그는 인간이 홀로 정의로울 수 없으며 만약 홀로 정의로운 자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