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2학기 두 번째 시간은 산지박(山地剝 ䷖)과 택천쾌(澤天夬 ䷪)를 읽었습니다. 저번 시간에 읽은 지뢰복, 천풍구에 이어 구석에 몰린(?) 음양 두 번째 시간입니다. 박괘는 양이 음에 몰려 맨 위에 자리하고 있고 쾌괘는 음이 양에 몰려 맨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역> 괘의 효들이 아레에서 위로 운동하기 때문에 사실상 괘의 마지막 시퀀스를 음과 양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복과 구는 아무튼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것었는데 반해 박과 쾌는 괘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상효에 있는 음과 양, 이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볼 수 있을까요?
산지박괘의 '박'은 '깎이다'라는 뜻입니다. 음이 육오까지 차 있고, 양은 하나 남은 상황을 '깎이다'라고 한 것은 이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각 효사들은 침상이 발부터 깎아올라가는 아슬아슬하고 편안하지 못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한 상황일수록, <주역>은 편안함이란 무엇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나와 다른 것들이 득시글거리는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괘사에서는 "함부로 나아가면 이롭지 않다"라고 합니다. 이 괘사에 대해 단전에서는 "소인의 세력이 자라기 때문[小人長也]"이라고 이유를 답니다. 박괘의 어디가 소인일까요? 정황상 다섯 음효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박괘의 상황을 "음유함이 양강함을 변화시키는[柔變剛也]" 때라고 정의합니다. 양의 힘이 편안할 수 있는 때는 지났습니다. 공영달은 '박'이라는 이름을 '해박(解剝)', 음이 양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양은 더이상 양처럼 살 수 없습니다. 건(乾)괘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가 뭐래든 종일건건(終日乾乾)할 수는 없습니다. 이질적인 음효들이 이렇게나 많고, 자신은 혼자일 때, 강건함만을 밀어붙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상구효는 괘에서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가장 높다는 건 힘이 제일 세기도 하지만 변하기도 쉬운 국면이라는 뜻입니다. 단전에 따르면 이때 군자라면 소식영허(消息盈虛)를 숭상한다고 말합니다. "자라남과 줄어듦, 가득 참과 텅 빔의 과정"을 중시한다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소인뿐인 암당한 상황에 일희일비하거나 자신의 양강함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제압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이 또한 변화의 한 국면이라는 것을 관(觀)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박괘 상구효의 효사는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 집을 없앤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입니다. 박괘에서 소인과 군자는 크게 보면 음효와 양효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하나 남은, 그것도 변화의 첨단에 남은 양의 힘을 쓰는 방법의 차이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양강한 힘이 음에 의해 풀어헤쳐져서 편안하지 못한 상황에, 가장 강한 자리에 하나뿐인 양의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 박괘의 답은 '군자라면 먹지 않고 남겨둔다'입니다. 하나 남은 양은 편하지 않은, 거진 망한 상황을 제압할 영웅의 힘이 아니라 다음 때를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꽤 공동체적입니다. 박괘 대상전은 상(上)이 박괘의 상을 보고 할 일은 "아래를 두텁게 해서 집안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집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식구들과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집이 설령 맘에 안드는 것으로 가득하고 불안하더라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속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깎여나가고, 어떻게 보면 내가 있는 편안한 집을 깎아내리고 있는 '아래'를 거두고 편안하게 할 의무가 상(上)에 있는 것이죠.
한강백은 상구효를 두고 "박괘의 끝이며 홀로 완전하여 백성을 비호하는 그늘이 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소인은 석과를 먹고 집을 완전히 깎아버립니다. 이를 두고 서양의 영웅과 동양의 군자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양의 영웅에게 위기는 힘을 증명할 기회이지만(그래서 집을 많이 태워먹습니다. 자세한 건 마블영화를 보시면...^^), 군자에게 위기란 어쩌면 특별한 순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편안하지 않으면 않은 대로 함께 하는 이들을 계속 돌보는 것이겠죠. 어쩐지 <중용> 14장,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을 바탕으로 행위한다는 군자가 떠오르기도 합니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군자가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上不怨天 下不尤人, 두 글자로 줄이면 樂天^^] 이유는 자신이 편안할 수 있는 바탕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동양의 군자는 서양의 영웅과 달리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제자들을 이끌고, 이 세상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 같습니다.
쾌괘는 박괘와 반대로 양효들이 힘이 넘치고, 음이 맨 윗자리로 몰려 있습니다. 이럴 때 '쾌'라는 이름은 '결단한다'라는 '결(決)'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전에 따르면 하나 남은 음유함을 강이 결단해서 끝내 쳐버려야 한다[剛決柔也]는 것인데... 이 괘를 보고 박괘와 너무 다른 상육효 취급에... 이런 갈 데 없는 띠꺼운 마음(!)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맨 윗자리에 있는 소수자(?)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괘 해석에 있어 음과 양, 군자와 소인이라는 본질적 정의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채운샘 강의에서 음양은 부호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죠. 같은 상효라도, 같은 소수라도, 그걸 둘러싼 배치와 관계에 따라 음양은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걸 공자(혹은 그에 준하는 해석자)는 소인과 군자라는 말로 해석한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으로 음양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쾌괘의 해석을 심플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다수인 양효가 가뜩이나 약한 음효를 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쾌괘를 단순히 양강한 힘에 의해 처단되는 소인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기에 쾌괘의 괘사는 너무 결연해 보입니다. "왕의 조정에서 드러내[ 揚于王庭]"고 "믿음을 가지고 호령하여 위험을 알리[孚號有厲]"는 모습은 하나뿐인 음을 처단하는데 너무 힘을 크게 쓰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요. 그 이유는 음유함이 상육효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전에서는 굳이 왕의 조정에서 드러내야 하는 이유를 "음유함이 다섯 강을 탔기 때문[柔乘五剛]"이라고 설명합니다. 상효는 아래에서부터 보면 맨 윗자리이고 외괘와 내괘의 관계에서 보면 가장 먼저 외부로 드러나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안에서 꾸준히 잘 다지더라도 얼굴마담이 우유부단하거나 사사로움에 얽매이는 소인이라면, 완전 황되는 거지요. 그리고 상육효는 변화의 국면이기도 합니다. 한강백에 따르면 쾌괘는 "모든 효가 양효인데 쾌의 극에 소인이 있"고 "이 소인은 군자의 도가 자라나서 사람들이 함께 버리는 바"로 해석됩니다. 소인이 맨윗자리인 상효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날뛰면(가령, 괘사에서 염려하는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디 하소연할 데고 없는 것이죠. 쾌괘는 이를 제대로 된 인재 등용과 법칙을 잘 세우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소인을 결단하게 하는 건 본받을 만한 모범과 바로잡아주는 규율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보면 박괘와 쾌괘 둘 다 상효에 있는 중심적인 힘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경계하는 괘가 아닐까 합니다. 군자의 도가 쇠미할 때 오히려 이질적인 타자와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는 박괘, 소인이 윗자리에 있을 때는 엄격한 단속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