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학기 3주차(5/21) 공지 ***
① 과제: 산택손(山澤損)·풍뢰익(風雷益)괘 읽고 정리해서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② 간식: 은정&문빈샘
올해 주역팀은 오전 1교시는 동서양철학사 2교시는 주역 세미나 3교시는 주역의 사유를 좀더 확장할 수 있는 동서양의 철학을 팀별로 파고들겠다는 엄청난 각오로 시작을 했는데요. 한 한기를 해보니 네~ 역시 힘에 부치더라고요. 각자 모두 엄청난 세 덩어리를 하려니 조급해져서 이도 저도 깊이 있게 공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2학기에는 주역 토론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채운샘의 길잡이 강의를 추가하면서 문제점들을 보완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 말 나온 김에 오후 채운샘의 인트로 강의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 주역 읽기의 왕도
우리가 규문서 하는 공부란 게 학교에서 하는 공부처럼 똑떨어지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교육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 답답하고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처음 주역을 접하면 한자의 장벽 때문에 우선 좌절스럽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몇 번씩 읽어도 답답한 게 음양(陰陽), 길흉(吉凶), 때(時) 등등의 개념들에 대한 딱 떨어지는 일관된 해석이 없고, 괘마다 효자리마다 매번 다르게 읽혀서 정말로 답답하고 멘붕이 오는데요. 어떨 때는 좋다고, 소중하다고 떠받들다가 또 어떨 때는 과하다고 그러고요. 그래서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화딱지가 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그것을 어떤 상황에서든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이나 사고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방식은 여러 비슷한 상황들을 주어진 개념의 틀에 맞추어 같은 것으로 묶어 쉽게 정리할 수는 있으나, 실은 조금씩 다른 상황들을 고려치 않고 같은 것으로 대충 때려잡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역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하나의 개념규정으로 모든 상황을 한 큐에 정리하고 이런 규정에 머무르려는 마음을 매 순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주역에서는 개념 규정이라는 상태로 묶어두려는 것 이전에 음과 양의 끊임없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세계가 먼저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주역 자체가 다수의 저자들이 몇 천년의 세월 동안 참여하면서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담론들로 켜켜이 쌓여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해석을 기대하는 것이 애초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역을 읽을 때는 우리가 기존에 공부하던 습관대로 ‘음양이 뭐다’, ‘때는 무엇이다.’라는 식의 정의를 찾으려고 해봐야 별로 들어맞지 않아 답답함˟소화불량˟짜증이 몰려 옵니다.
그도 그럴 것은 음양은 언제나 각 상황에 따른 힘의 상대적인 역동적 관계성 안에서 매번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역을 읽을 때는 음양의 대략의 개념과 용법들을 숙지하되 그것이 변화의 역동 속에서 실제로 특정 괘의 때와 효자리들의 다양한 정황들을 살펴 입체적으로 읽어내면서 음과 양이 각 괘들에서 어떤 힘의 관계로 작동하고 있는지 다양한 용법들을 익히라고 채운샘은 당부하셨습니다.
채운샘은 이렇게 각각의 괘의 때와 상황에 따른 음양의 힘관계의 용법들을 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들뢰즈의 ‘극화 혹은 드라마화’ 개념을 일러주셨는데요. 드라마화의 기법은 마치 하나의 극본이라도 그것이 상연되는 시공간이나 연기자에 따라 다른 느낌과 방식으로 상연되는 것에서 착안한 질문방식이라고 합니다. 즉, 드라마화로 괘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드러나는 상황은 그것이 처한 천지의 때(時)와 인간이라는 개체들이 처한 정황을 모두 고려하는 질문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만나는 사건을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단순하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려는 사고습관 대신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느끼는가?’라고 세심하고 신중하게 상황을 읽으면서 천천히 맥락 속에서 어떤 힘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사유방식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라는 게 이리저리 시도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가는 것이란 채운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요런 혼미한 카오스의 과정을 온전히 즐기되, 차분하고 단단하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이런 식의 질문방식은 주어진 상황에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방식이 옳다고 믿고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면서 때에 맞게 나름의 삶의 처방을 내리는 기예를 발휘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니 힘에 부쳐도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2. 오전 주역토론 후기
지난주에는 박(剝)괘와 쾌(夬)괘를 공부했습니다. 맨 위에 양효 하나만 남고 나머지 다섯효가 음효들이 올라오는 형상인 박괘와 반대로 맨 위에 음효 하나가 있고 다섯양효들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형국인 쾌괘인데요. 어떤 얘기들이 팀별로 오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규·수팀
저희조에서는 산지박괘와 택천쾌괘의 상효를 가지고 우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상효는 오효(왕)보다 더 위에 있는 자리로 대부분 괘에서 효사가 지위는 높으나 힘은 미약하거나, 지나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상효가 괘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그 괘의 마지막이자 다음괘로 넘어가는 변곡점, 가장 외부로 열린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지박괘에서는 마지막의 양효가, 택천쾌괘에서는 마지막의 음효가 중요한 자리입니다.
저는 지난주 읽으면서 박괘 상구효 효사가 ‘큰 과실을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 집을 없앤다.’ 쾌괘의 상육효 효사가 ‘울부짖어도 소용없으니, 끝내 흉함이 있다.’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나 남은 양과 음인데 왠지 박괘는 긍정으로, 쾌괘는 부정으로 해석되는 것 같았습니다. 양은 군자, 음은 소인에 비유하는 것이 그 안에 가치평가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저희가 예전에 읽은 정이천이나 북송시대 학자들은 그런 평가가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우리는 양, 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가 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군자 소인의 설정도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2교시에 채운쌤께서 설명을 해주셨듯이 음과 양을 어떻게 대립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축하며 대응하는 관계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저희가 배우는 괘에서 응용을 열심히 해 봐야겠지요.
규창쌤은 공통과제를 박괘와 쾌괘를 공동체의 결합, 즉 정치로 연결지어 쓰셨는데 박괘와 쾌괘는 상황은 다르지만 이질적인, 동일화 될 수 없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재미있었습니다. 현정쌤은 박의 때를 맞이하는 것에 대해 쓰셨습니다. 예전에 깎이는 박의 때를 살았을 때는 좌절과 자책으로 더 힘드셨다면 다른 방식으로 박의 때를 맞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셨습니다. 박을 능동적으로 맞이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따끈따끈하게 배운 1교시의 견유주의 철학자들의 태도가 박의 때를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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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옥팀
먼저 우리가 괘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괘를 통해 세상을 읽으려 할 때 세상을 타자화시키지 않고 내가 세상의 흐름 속에 있음을 견지하고 괘를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괘가 나의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내가 취할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반면 흐름의 한 국면을 하나의 괘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상황에도 64괘가 다 들어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처한 때와 괘를 어떻게 연결할지 어렵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처한 때는 64괘의 흐름 속에 있으므로 내가 지금 어느 괘를 통과하고 있는지 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공부가 자신이 처한 때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 같습니다.
박괘에서는 삼효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박괘는 깍이고 소인이 자라는 때입니다. 삼효는 위아래의 음이 모두 양을 깎는데 자기만 홀로 양에 응합니다. 조원 중 한 분이 어떤 상황이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주위 사람들은 그것에 동조하거나 묵인할 때 자신은 삼효처럼 홀로 뚫고 나아갈 수 있을까, 그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다른 조원분은 '응(應)'한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때 응한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인들의 무리에 물들지 않겠다는 발심도 삼효가 육효에 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또 양에 이미 음이 내포되어있고, 음에 이미 양이 내포되어 있듯 소인도 공명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공명심을 발휘할 수 있는 관계, 장이 중요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보통 괘의 이효는 평민의 자리라서 흉한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괘의 이효는 정하고 중한 자리임에도 흉하다고 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상전은 이효를 말할 때 ‘더불어 함께 하는 자가 없다’라고 합니다. 삼효는 중정한 자리에 있지 않아도 응할 육효가 있어 허물이 없는 반면 이효는 중정한 자리에 있어도 함께 할 자가 없어 흉합니다. 이효가 무엇을 할 때 함께 할 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쾌괘에서는 초효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초효는 결단의 시초에 마땅히 계략을 자세히 살펴야 함에도 발부터 성급히 내딛어 이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무엇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자기중심을 잡고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함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또는 마음만 성급해서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불었던 영끌 현상도 초효의 우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결단의 시작에 성급한 마음이 내재되어 있고 이를 경계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양에 음이 잠재해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효의 ‘척호(惕號)’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척호는 ‘두려워하며 부르짖는다’는 뜻입니다. 이효는 中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두려워할 줄 알기에 적이 온다고 해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조장님은 이를 사려깊음으로 표현했는데요. 효를 하나씩 보면 볼수록 주역은 늘 상황의 이면을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양과 음이 서로를 내포하고 있음을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속의 음을 보고 음속의 양을 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려깊음인 것 같습니다.
* 영·랑팀
저희 팀에서는 우선 괘들을 어떻게 읽어나갈지에 대한 결의가 있었는데요. 3년 가까이 주역을 공부하셨다는 팀원분은 지금까지 주역을 읽을 때는 기존의 해석들에 주목해서 이것이 무엇일까에 집중해서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배님들의 많은 해석들을 존중하되 괘사와 효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떤 때라고 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다른 팀원분들도 이 말에 크게 공감하며 틀려도 좋으니 괘들의 상황에 공격적으로 달려들어 한마디로 걍 우리 맘대로 해석해 와서 토론시간에 집중적으로 서로 물고 뜯어보자고 했습니다. 괘들은 안온한 상태로 있는 게 아니라 무척 역동적인 변화의 중에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일텐데요. 괘를 읽다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괘에 대한 표상에 갇혀서 괘들을 멈춰놓고 보거나 단편만 보고서 괘를 대충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괘를 나의 기존의 틀에 맞추어서만 읽게 되면 몇 년씩 주역을 읽어도 괘들을 다르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렇게 막 써와서 물고 뜯어보면 괘들이나 효들이 좀더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 팀에서는 박괘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는데요. 한 선생님은 박괘를 아래의 다섯 음효들을 생명의 활동성이 줄어들고 무기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생명의 활동성인 맨 위의 양효를 깎아내는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큰 산이 땅으로 무너져 내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깎임이 발에서 스멀스멀 시작되는가 싶다가 어느 순간 피부에까지 엄습해 전체가 무너지는 때인데요. 이런 박의 때를 심심해서 유튜브 영상감상이나 혹은 잠깐의 웹서핑은 괜찮겠지 하면서 하루 중 짧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행위들이 알고리즘을 타고 타면서 정처없이 떠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를 보내고서 몸과 마음이 허탈하고 무기력해지는 때로 본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 미세한 마음이 커져서 무기력에 빠질 때 할 수 있는 일로 유일한 양효인 상구에 주목했습니다. 소인이 집을 허물 듯이 어차피 망친 하루 더 망치자고 하면 무너진 자리에 무너짐을 더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일상적 관계를 살피고, 마음과 습관을 돌아보면서 삶의 토대를 단단히 하는 것이 박의 때에 할 수 있는 행동지침이라고 보았습니다. 한편 다른 분은 박괘를 단순히 산이 땅으로 주저앉은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실은 이전에 이미 어떤 상황의 생성을 통해 나온 결과로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지, 나의 활동의 과정이나 시간성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임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단순히 박괘는 모든 것이 풍비박산난 상황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생성의 싸이클이 다했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64괘에서 피해야 하거나 건너뛰어야 할 부정의 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가는 바를 두지 마라(不利攸有往)’는 정말로 가만히 있으라기 보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돌아보고 다른 방향이나 리듬을 생각해보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쾌괘에서는 하나 남은 음효를 결단하여 막혔던 물길을 터주거나 오랜 시간 고질적으로 남아 있던 무리나 병폐 혹은 습관을 척결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이런 모든 것은 결국은 화(和)를 지향함에 있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쾌괘를 보면 아래에 다섯양효가 으쌰으쌰 힘을 받아 기세좋게 올라가고 있는데도 마지막 남은 음을 떨궈내지 못해서 ‘스타일 구기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음을 척결하기 위해 공개된 장소(王庭)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효자리 마다 머뭇대지 말고 얼른 척결하고, 사소한 정에 이끌리지 말고 가차없이 척결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처사가 아래의 다섯양효의 기세에 비해 힘을 과하게 쓰고 너무 오바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설렁 대충하면 고질적인 병폐는 뿌리 뽑지 않으면 어느샌가 또 뾰족올라와서 신경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해 보인다 싶게 행동 하는 것이 얄짤없이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실은 화합(和)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음양은 봐도봐도 어려운 것 같아요. 상보적이라는 것이 아주 많은 해석의 여지를 담고 있어서 그런 것도 같구요. 이 음양의 상보적 관계가 매번 관계 안에서 새롭게 음양이 구성된다는 측면에서 '드라마화' 이겠죠. 어려운 건 상수니까, 그렇다치고 계속 읽어봐야죠 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