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산택손(山澤損 ䷨)과 풍뢰익(風雷益 ䷩)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손(損) 하면 손해, 익(益) 하면 이익을 떠올리고, 둘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이익은 지금 있는 것에서 더해지는 것이고, 손해는 지금 있는 것을 덜어내는 것 혹은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주역>에서 손괘와 익괘를 읽으면 단지 지금 상태를 기준으로 마이너스 혹은 플러스 상태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 괘 모두 기본적으로 '덜어냄'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손괘는 '덜어내다'라는 의미입니다. '덜어냄'을 말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그런데 왜 익괘에서마저 덜어냄을 말할까요? 그 이유는 <주역>의 괘들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고찰하기 때문일 겁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나에게 더해짐은 다름아니라 다른 이가 덜어낸 것이고, 내가 덜어냄은 다른 이에게 더해진 것일테니까요. 손괘와 익괘는 이 덜어냄이 어떤 양태로 이루어지는지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태에 따라 덜어냄이 손(損)이 되기도 하고 익(益)이 되기도 한다고요. 손괘와 익괘의 차이는 덜어냄의 방향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덜어주느냐, 아래에서 위로 덜어주느냐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손(損)이 덜어냄의 나쁜 상황이고 익(益)이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각자 상황에 따라 군자로서 대비하고 경계해야 하는 게 다를 뿐입니다.
손괘의 경우 아래에서 위로 보태주는 모양입니다. 단전에서는 이를 손하익상(損下益上)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경우 위에서 아래를 수탈해, 결국 기초를 깎아먹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에 따라 손괘를 "백성을 깎아 군주를 만드는 상"(주희) "아래를 덜어 위로 보태서 끝내 위태로워지는 상"(정이천)으로 보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각해보면 분명 아래에서 위로 보태줘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금이 있지요. 좀 더 생각해보면 국민이 보태주지 않으면 위험한 국가적 위기 상황도 있습니다. IMF 시기의 금모으기 운동 같은 것도 그 일환이었죠.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보다 윤택하고 조화롭게 운영되기 위해 보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교통약자의 이동권 증진을 위한 '배리어 프리 요금제(교통약자의 이동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없애고 보완시설을 강화하는 제도 실시를 위해 마련된 요금제)'를 실시했고, 대중교통 요금이 인상되었다고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덜어내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문제는 이 덜어냄을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겠지요. 손괘에서는 유부(有孚)를 강조합니다. 유부란 아래에서 위로 덜어서 보태줄 때, 이 보탬이 곧 이로움이 된다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세금을 걷어갔는데 그 돈이 아무리 생각해도 특정 계층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세금은 착취가 됩니다. 덜어서 보태주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빼앗긴다는 느낌이 들죠. 또 아무리 대의가 좋고 참작 가능한 상황이라도, 아무런 설득이나 소통의 과정 없이 요금을 올린다면 선뜻 마음을 열고 보태주기 어려워집니다. 반면 충분한 설득 과정과 소통이 있을 때 아래에서 덜어내는 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때 덜어냄은 손해가 아닌 이로움이 될 수 있지요.
어떻게보면 익괘는 손괘에서 보태지는 자리에 있는 치자(治者)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익괘는 위에서 아래로 덜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단전에서는 손상익하(損上益下)라고 하지요. 아래에서 보태주는 일이, 아랫사람들의 손해가 되지 않으려면, 모인 재화와 마음은 곧바로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합니다. 익괘의 괘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는 것이 이롭다.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利有攸往 利涉大川]."라고 하며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보태진 것을 즉시 그 문제에 맞게 써야 한다고 말하죠. 그것이 어려움을 건너는 떳떳한 도리라고요. 이때 위에서 덜어냄은 모두의 익(益)이 될 수 있습니다. 한강백은 괘의 이름이 익(益)인 이유로, "명왕(明王)의 도는 뜻이 아랫사람을 은혜롭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밝게 아는 왕, 전체성에 입각하여 사려하는 사람은 떳떳한 도리에 맞게 덜어낸다면 그것에 곧 이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손과 익이 너무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서로 동떨어진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로움을 누리고, 손해를 보는 것이 모두 나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끊임없는 축적만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지금만큼 개인의 이익과 공정한 관계를 강조하는 시대도 없지만, 그만큼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스리는 이가 따로 없는 지금같은 대중지성의 시대에, 공동체와 관계 속의 이로움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노자는 공동체가 운영되는 것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모르게 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도덕경> 17장입니다.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친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말의 신험이 부족한 곳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윽하여 천지와 더불어 묵묵히 가는도다! 다스리는 성인은 그 말을 귀히 여기는도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잘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 하는도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도덕경> 17장)
처음 17장을 읽었을 때는 말 없이 알아서 잘 해내는 왕을 찬양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손괘와 익괘를 읽고, 다시 들여다보니 백성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왕을 그리는 구절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특히 "말의 신험이 부족한 곳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信不足焉 有不信焉]"라는 구절이 그렇습니다. <도덕경>을 읽다보면 의외로 말의 신뢰를 강조하는 구절이 여러번 반복됩니다. 말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텍스트인데 말이죠. 그건 아마도 한번 내뱉어진 말의 무게를 중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내뱉어진 말과 이루어진 것이 동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손익이 우리가 생각하는 손해와 이익이 아니라, 덜어내고 보태주는 관계라는 발상이 읽을때마다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말에 갇히고, 한 번 성립된 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손익은 주역적 감응방식의 하나인 것 같네요.. 노자도 말(言)과 成事 가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게 益의 실천으로 보이네요. 다른 듯 닮은 두 텍스트, 쭉 해석부탁해요~~~ ㅎ
노자의 구절과 비교해볼 때 주역의 구절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 걸 보면 주역을 공부하고 있는 것 맞나 봅니다. 주역을 읽고나서 노자를 다시 더 풍부하게 해석해 보는 혜원샘을 보니 괜한 책 욕심이 생기네요. 지금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