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화천대유(火天大有 ䷍)와 뇌화풍(雷火豊 ䷶)을 읽었습니다. 괘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두 괘 모두 풍족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상황에 대한 괘입니다. 큰 소유, 풍요로움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입니다.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는 부자 되는 법, 돈 많이 버는 법을 알려준다는 책이 널려 있지요. 부유해지면 지금 겪는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다는듯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널리 통용되는 긍정적인 가치가 부유함, 소유, 풍요로움입니다. 하지만 <주역>은 아무래도 그 베스트셀러 코너에 누워있기에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일관되게도, <주역> 64괘는 상황마다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만 알려줄뿐, 좋은 상황에 다다르는 법, 나쁜 상황을 피하는 법은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유(大有)와 풍(豊) 또한 크게 소유한다는 것, 풍요롭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인지 말해줄 뿐입니다.
대유(大有)와 풍(豊)의 공통점은 소성괘 리(離, ☲)가 있다는 것입니다. 리(離)괘는 크게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밝은 지혜입니다. 물상이 불[火]인 리괘는 <주역>에서 문명(文明)하다고 표현됩니다. 이번에 읽은 대유, 풍 역시 단전에서 문명(文明)과 명(明)이라는 글자로 설명을 했죠. <주역>에서 리괘는 타오르는 불처럼 밝은 인식능력을 가리킵니다. 리괘는 대유(大有) 같은 경우는 하늘 위에서 비추는 태양처럼 높고 밝은 지혜로, 풍(豊)에서는 태양이 지상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것 같은 세심함으로 드러나지요.
대유(大有)는 음효가 하나뿐이고, 존위의 자리(육오효)에 있습니다. 육오효는 포용력 있는 군주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몽하기보단 그들이 가진 각자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지요. 자기를 내세우기보다는 "상하(上下)가 뜻을 함께 하여 응"(정이천)하고 협력하는 군주를 <주역>에서는 '대유'로 그린 것입니다. 지금은 소유를 말할 때 어디까지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에 한정합니다만, <주역>에서는 공적인 결속이 곧 소유라고 말하는 것이죠. 풍괘 또한 풍요로울수록 그늘진 곳 없이 밝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풍괘 괘사에서는 "태양이 중천에 뜬 것처럼 해야 한다[勿憂宜日中]"고 말하죠.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정오의 태양처럼, 진정한 풍요는 나의 안락이 누군가의 그늘을 초래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뜻을 받아, 단전에서는 유독 성대함의 이면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해는 중천에 뜨면 질 일만 남았고 달은 차면 기운다[日中則昃, 月盈則食]"고 말이죠. 이런 구절은 풍요의 때가 한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계의 말이기도 하겠지만, 풍요란 이 미세한 변화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리괘의 두 번째 해석은 붙음[麗]입니다. 불은 어딘가에 붙어 있지 않으면 타오르지 않습니다. 뜨겁게 타올라서 다른 것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언제나 자기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요. 이런 이치를 반영하여, 리(離)는 아래 위로 양효가 있고, 가운데는 음효가 있습니다. 강건한 힘 가운데 타자를 부드럽게 포용하는 힘이 자리하고 있는 거지요. 정이천은 대유괘의 리괘에 대해 "그 비어 있음[虛中]으로 상하(上下)가 뜻을 함께 하여 응하니 이 때문에 대유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비어 있다는 건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죠. 대유의 협력하는 역량, 풍의 섬세함처럼.
저는 유(有) 하면 중국의 성왕(聖王)들이 떠오릅니다.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공자, 맹자쯤 되는 분들이 성인을 떠받들 때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실 정도셨다[富有四海之內]"라고, 꽤나 세속적인 칭찬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청빈하고 희생적인 기독교 성인 이미지가 익숙했던(^^) 저로서는 좀 의아한 말이었지요. 소유를 어디까지나 불가침의 사유재산으로 생각하기에, "천하를 가졌다"는 말에 숨은 책임이나 인식역량은 읽지 못한 거죠. 풍요로움 또한 소유의 연장선 정도로 인식하게 되고요. <중용>에는 천하를 소유한 성왕이 여럿 나오는데요, 대표적으로 문명(文明)하신 왕을 꼽자면 순임금 같습니다. 공자는 순임금을 "위대한 지혜(大知)"로 칭송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께선 크게 지혜롭구나. 순임금께선 묻기를 좋아하시고 비근한 말에서 살피길 좋아하시며 나쁜 점을 감춰주시고 좋은 점을 널리 알리시며 양단을 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셨으니, 이것이 순임금이 되신 이유이니라.[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중용> 6장
<중용> 6장의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은 대유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대상전 "악을 숨기고 선을 드날려 하늘의 아름다운 명에 순종한다[遏惡揚善, 順天休命]"의 '알악양선'입니다.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낸다는 건 칭찬만 열심히 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동양에서 악(惡)은 실체화된 악한 행동이 아니라 오(惡), 밉고 역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선(不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악은 반드시 배제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선(善)은 반드시 수호되어야 할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타자와 관계 맺으며 창조되는 어떤 좋음, 잘 됨[善]일 것입니다. 중국 문명을 연 군주 중 한명인 순임금은 그 협력에 능했다 할 수 있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묻기를 좋아하고 비근함을 살피길 좋아하는" 구체적이며 일상적인 면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대유와 풍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포용할수록, 신경 쓰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할수록 풍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풍성함을 자유로움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부유하고 풍요로움을 더 크고 많은 소유로 생각하고 추구한다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우리는 그 소유와 풍요를 누릴 수는 없겠지요. 더 큰/많은 뭔가가 끊임없이 나타날 테고, 불만족은 이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대유와 풍은 외부적 기준에 의거한 풍성함이 아닙니다. 내가 붙어 있는 현실, 실재, 타자와 구성해 나가는 것이죠. 순간적인 우월감이나 경쟁심이 아닌, 내가 놓인 현실을 직시하고 계속 다르게 구성하려는 노력을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는 외부적 기준과 끊임없는 결여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노자식으로 말하면 네 글자가 됩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去彼取此]!" <도덕경>에 여러번 나오는 이 구절은 '저것', 관념적 허구와 허황을 벗고 '이것', 나에게 가까운 일상이자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실재로 돌아오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대유/풍의 때는 무엇이 '저것'이고 '이것'인지, 우리는 무엇과 함께 해야 하는지, 생각할 시간인 것 같기도 합니다.
대유괘의 알악양선이 기억에 남습니다!! 악과 선을 실체적으로 사유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조성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재밌네요! 알악양선 뒤에 따라오는 순천휴명은 무슨 의미일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