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빛과 풍요의 이미지로 가득한 두 괘, 화천대유와 뇌화풍 괘를 읽고 얘기나눴습니다. 리괘가 운동성 강한 건괘와 진괘를 만나 어떻게 유사한 의미를 낳고 또 갈라지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풍요로움의 질적 차이들이 어떤 조건에서 그리되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분별해서 우리의 윤리로 가져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日中見斗’와도 같았을 각 조의 토론 풍경을 전합니다. 우리의 빛나는 지성과 양지를 덮고 있는 두터운 휘장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정옥 조>
우리 조에서는 大有와 豊의 의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먼저 大有에서의 大’는 크다, 넓다, 두루의 뜻이, ‘有’는 있다, 존재하다, 많다, 넉넉하다, 소유하다 라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大有는 ‘크게 소유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우린 ‘무엇인가 소유한다’라는 의미를 물질적인 것의 소유 여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大有는 大中의 의미도 되지요. 柔(육오)가 존위에 거함이 바로 ‘大’이고, 上卦(離卦)의 안에 거함이 바로 ‘中’으로, 大中은 태양의 덕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은, 세상 모든 물(物)들이 귀속하게 하지요, 그러니 풍성하고 성대한 소유의 상이 바로 大有입니다. 그렇다면 大有의 풍부함은 어떤 뜻을 내포하는 것일까요. 태양은 천지자연에 빛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자신을 비웁니다. 육오는 비우는 방식으로 중도를 지키고, 만물을 자라나게 하니, 그것이 육오의 풍요함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비우고 베푸니 주변의 양(陽)들이 육오에게 응합니다. 육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비움과 동시에 풍성해지는 것이지요. 그때의 풍성함은 비우기 이전과는 질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주역을 공부하는 이유도 이러한 비움의 이치를 깨닫고 다르게 느끼고 인식하기 위함일 것이지요.
대유의 시대에 군자는 ‘알악양선(遏惡揚善, 악을 틀어막고 선을 드날림)’해야 하는데, 이때의 선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일음일양/소식영허를 이어가는 게 선악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일음일양/소식영허와 선악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천지의 일음일양에 맞게 문명(지성, 기물, 제도)을 행하는 것이 선이라는 말을 주고받았는데요, 그 말 자체가 잘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일 수도 있겠지요. 백만 명밖에 안 되는 만주족이 3억의 중국 백성(한족, 황족 등) 및 관리들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의 중심에 강희제가 있습니다. 강희제는 음양소식에 맞게 문명을 드날리는 선을 행했지요. 그가 “부드러움(육오)의 존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큰 것들(陽들) 속에서 중용의 도를 발휘”했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원나라가 중국을 억압적으로 지배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중국을 유화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억압이 악이라면 그는 그것을 틀어막고 문명의 선을 드날리는 지성을 발휘한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제 豊의 풍성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풍요로운 豊의 시대에 정신적인 어두움(내적인 미망)이 커지는 이유는 왜일까요. 풍요의 시대에 왜 어둠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왕부지는 풍성함을 “음들의 풍성함”으로 제시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양(陽)들이 음으로 인해 가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음양의 결합이 아니라 양(陽)들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초구와 구사의 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음이 융성한 시대에 초구와 구사는 서로 도움을 주는 동지적, 사회적 결합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러한 배주(配主)와 이주(夷主)의 결합이 풍부함의 순환과 변환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정랑 조>
풍족함과 풍요의 때를 말하는 대유괘와 풍괘. 이 두 괘는 일반적인 호응과는 다르게 독특한 방식으로, 절실하게 응 관계를 형성합니다. 아마도 풍족함을 누리기가 힘들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먼저 대유괘부터 얘기해 보겠습니다. 화천대유는 다섯 개 양효에, 하나의 음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하나의 음효가 바로 오효이며 밝음과 걸림을 의미하는 리괘에 속합니다. 육오는 비록 하나이지만 태양처럼 다른 모든 양효들을 포용하고 있고, 양효들은 기꺼이 육오를 받들고 있습니다. 구이효는 무거운 짐을 수레 가득 싣고서 사람들에게 군주의 덕과 부유함을 나누고, 구삼효는 강건함과 부유함의 공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천자에게 공을 돌리며, 군주 바로 옆의 구사는 자기 힘을 과시하거나 이용해 먹지 않습니다. 상구는 더없이 군주를 돕는 역할을 하여 하늘의 명을 받드는 참으로 드물게 태평성대를 이루는 시기라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대유의 풍족함은 사람들 각자가 서로를 높이고 포용하면서 존재감을 높이는 것, 대통(大通)의 시기임을 “크게 소유함”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대상전에서 말하는 알악양선 순천휴명(遏惡揚善, 順天休命)이 이것입니다. 이때의 군주는 백성들의 선을 드날림으로써 악함이 자연스레 억제되게 하며 그것이 하늘의 뜻을 받들고 각자의 직분을 다하여 명을 아름답게 가꾸는 순천휴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말하면 리더된 자가 태양이 비추는 것처럼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의 직분을 다하되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귀결되게 하는 모습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구성원들이 내부적으로 정화가 되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풍괘는 대유괘와 달리 리괘가 아래에 있습니다. 아래의 태양은 상괘인 진괘, 우레의 도움으로 번개가 번뜩이듯 온 세상에 자신의 힘을 펼쳐 보이는 모습이며, 이는 한낮의 태양빛처럼 강하고 매우 환하게 만물을 드러나게 하며 매우 풍성한 모습입니다. 태양이 천지를 비추는 이미지가 대유인가, 풍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였는데 모두 태양이 비추지만 풍괘는 번개처럼 번쩍하는 이미지의 성격이 더 강하며 곧 기울어짐을 경계하는 의미가 강하다고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단전에서 明而動을 말하듯 여기에서는 짝을 이루는 것이 양은 양끼리 음은 음끼리 호응을 하여 힘을 발휘하는 시기입니다.
풍괘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때에 자꾸 거적떼기나 휘장으로 가려서 마치 깜깜한 밤이 되는 효사들이 나오는데 이는 하괘의 離(태양, 밝음)을 가리려는 것이며 이는 풍요를 자기 것으로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풍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때로 이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육오효처럼 대궐같은 집에서 살지만 자신을 가둬놓고 아무도 오지 않는 파국으로 될 수 있지요. 비유하자면 요즘 같이 교류의 물질적, 문명적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빈곤함을 느끼게 되기 쉬운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주역의 괘들에서 내가 현재 누리는 것들을 내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益괘에서 위를 덜어 아래를 주는 것과 大有괘, 豊괘는 어떻게 다를까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익괘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면, 대유괘나 풍괘는 소유물을 나누어 준다기보다는 같이 공유함으로써 풍요로와짐을 얘기하는 것으로 생가해보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했습니다. 어려운 괘였지만 서로 얘기들을 나누면서 조금씩 주역의 괘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 조원들들의 글과 이야기가 많은 도움이 되는 만큼 지금 현재의 상황으로 괘들을 끌어서 얘기해보려는 시도들을 해 보자고 조원결의(?)를 했습니다.^^
<규창조>
대유괘와 풍괘에 대한 이번 저희 조의 토론은 뭐랄까, 여느 때보다 무척 형이상학적이었습니다. 특히 두 괘의 공통점인 리괘의 ‘비어있음’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는데요, 그렇다면 대관절 비어있다는 건 무어냐? 그것은 진공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거다. 비어있기 때문에 응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다. 이것을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며 누군가 설명합니다. 바퀴의 중앙은 비어있다. 수레의 운동성은 바로 비어있는(허) 것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수레의 바퀴가 굴러가는 이유는 바로 이 비어있음이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현시’, ‘황홀’, ‘홀황’등의 이야기를 하며 계속해서 비어있음의 이미지를 얘기하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엣 원스>에 나오는 도넛의 비어있음은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이렇듯 끝도 없는 비어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리괘의 또 다른 물상인 밝음, 지혜에 대한 얘기와 함께 문명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자께서 위대한 지혜(大知)라고 칭송한 순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순임금께선 크게 지혜롭구나. 순임금께선 묻기를 좋아하시고 비근한 말에서 살피길 좋아하시며 나쁜 점을 감춰주시고 좋은 점을 널리 알리시며 양단을 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셨으니, 이것이 순임금이 되신 이유이니라.(중용6장) . 바로 여기서 나온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을 대유괘의 대상전 "악을 숨기고 선을 드날려 하늘의 아름다운 명에 순종한다[遏惡揚善, 順天休命]"의 ‘알악양선'과 연결하며, 순임금은 왜 악을 숨기고 선을 드날리라고 했는지를 묻자, 또 누군가 답했습니다. (그 답이 궁금하시면 혜원샘의 이번 주 주역후기를 보세요!) 그러자 또 누군가 물었습니다. 대체 순임금은 누구냐고? .................. 흥미진진했던 토론은 ‘밥먹으라’는 공동체의 규율 때문에, 아쉽게도 끝을 내야했는데, 비어있음은 곧 채움이라 했기에 후다닥 식당으로 달려가 우리 모두 비어있는 배를 채웠습니다. 끝!
이번주, 5주차에는 ‘家의 道’를 종적 횡적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山風蠱와 風火家人을 읽습니다. 전자에서는 자식의 역할이, 후자에서는 부모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이게 지금 우리 시대의 가족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3차시에는, 채운 샘 강의가 있어서 조별 토론은 없고, 대신 에세이 주제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 갖습니다. 각자 에세이 컨셉 잡아오시면 되겠습니다. 간식은 은주샘, 희진샘. 맛있는 놈으로 부탁드려요!!!
간식은 미연샘과 혜원샘이랍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