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산풍고(山風蠱 ䷑)와 풍화가인(風火家人 ䷤)입니다. 두 괘는 모두 우리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주역>의 괘 중 그걸 말하지 않는 괘는 없습니다만, 다른 괘들보다 더(?) 존재론을 말하는 괘가 고괘와 가인괘입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고괘와 가인괘 모두 인간이 맺는 관계 중 최소단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괘는 가족의 일을 이어받는 이야기를, 가인괘는 이름이 말해주고 있듯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가족이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엄마-아빠-나로 이루어진 family는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범위도 크고, 그에 대한 감수성도 다르죠. 괘가 쓰여진 시대적 맥락을 간과하고 읽는다면, 고괘와 가인괘는 무척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고괘는 썩어버린 이전세대의 적폐를 청산하는 이야기가, 가인괘는 가정에서 땅에 떨어진 어른들의 위엄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수 있죠. 토론을 하면서도 괘가 놓인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는 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은 가장 우선시되며 끈끈한 관계이니까요.
지금은 잘되든 안되든 아이의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가정환경이고, 가정은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대에도 가내 평안을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달랐습니다. 지금이야 부모의 역할이 크지만, 고대에는 부모를 잘 봉양하고 계승하는 자식의 역할이 강조되었죠. 자식에게 강조되는 효(孝)라는 덕목은 있었으나 '좋은 부모가 되자!'라는 마인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가운데 승계를 말하는 고괘, 집안의 바름을 말하는 가인괘를 생각해 봐야 지금 우리와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인(家人), 다양성의 시너지
가인괘의 괘사는 "여자의 바름이 이롭다[利女貞]입니다. 가인(家人) 하니까 대뜸 여자 얘기를 하는 게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집안일은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의 말이니까요. <주역>에는 괘사에 가끔 군자(君子)가 아니라 여자가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가 배운 괘를 돌아보면 천풍구, 택산함, 그리고 가인괘가 그렇죠. 구괘와 함괘에서 여자는 취해지는[取] 대상이었습니다. 구괘의 괘사에는 물용취녀(勿用取女)가, 함괘의 괘사에는 취녀길(取女吉)이 있었죠. 이를 읽고 여자를 대상화 하는 시대로 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주역>에도 화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군자(君子)라면 여(女)는 생물학적 여자가 아니라 군자에 대비되는 타자의 위치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타자란 단순히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도 내재한 타자성, 다층적인 정체성을 말합니다.
괘사를 여자가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집 안에서는 집 밖과는 다른 모드가 되어야 이롭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조금은 현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괘라고 할 수도 있죠. 가인괘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서로 다른 영역이 올바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롭다[利]는 건 여자[女]가 아니라 여자가 올바른 결과 전체에 나타나는 효과인 것이죠.
가인괘는 이를 물상으로 보면 풍화(風火), 서로 불을 내고 바람을 내뿜는 관계로 나타냅니다. 공영달은 가인괘를 풀이하며 "이는 바람이 불에서 나온 것이다. 불이 나오는 초기에는 바람으로 인하여 막 치성하고, 불이 이미 불꽃이 성해지면 다시 또 바람을 내니, 가인의 도는 가깝고 작은 것을 닦아 망령되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불의 열기가 바람으로, 바람의 힘이 불꽃으로, 서로 다른 것이 시너지를 내는 관계를 풍화(風火)로 표현한 것이죠. 이때의 시너지는 같은 힘을 내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불은 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서로 다르게 운동합니다. 하지만 그 서로 다른 운동이 맞물릴 떄 전체 역량이 증대되지요. 가인괘 단전에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우며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한다[父父, 子子, 兄兄, 弟弟, 夫夫, 婦婦]"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한 쪽이 다른 이의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거나 도움을 주는 게 이롭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각자의 영역이 있는 가운데, 다른 누군가의 바름은 내가 내 영역의 올바름을 지킬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가인은 엄격함을 강조합니다. 이때 엄격함이란 뭘까요? 엄격함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잘못을 한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는 부모를 떠올립니다.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지 못하는, '부모답지 못한 부모'를 보면 혀를 차기도 하지요. (그런데 재밌게도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자상하고 친근하게 구는 부모상을 권장합니다...이중구속에 갇힌 부모...) 하지만 가정에서의 엄격함은 아이와 부모의 거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가인에서 엄격함이란 각자의 역할을 얼마나 때와 상황에 맞게 수행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직적으로 보면 부모의 자식이지만 수평적으로 보면 누군가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 부모의 형제나 자식의 친구가 되려 하면 안 되는 거죠. 또 집안에서 입는 옷과 밖에서 입는 옷, 걷는 방식, 인사를 주고받는 법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고, 그걸 지킬 때 전체는 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64괘 중 가장 지금 필요한 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이로움[利]을 추구하는 때, 어떻게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이로울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니까요. 새삼 <주역>에서 이로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蠱), 익숙함과 혼란
가인괘의 각자의 영역에 대한 존중과 다양성이 주는 풍요로움이 있다면, 고괘에는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에 대한 존재론이 있습니다. 고(蠱)라는 글자는, 개인적으로 64괘 이름 중 가장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글자가 많은 <주역>에서도 비일상적으로 보이고요. 그릇 안에 벌레가 있는 글자를 두고 해석자들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제기에 벌레가 꼬일 정도로 방치되었다는 해석도 있고, 그릇에 영양만점 벌레반찬을 담아(굿 프로틴!) 부모에게 진상하는 태평성대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혹은 누군가를 홀리고 혼란스럽게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공통점은, 고괘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눌러앉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제기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방만한 분위기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오래도록 계속되면 좋겠다 느낄 정도의 태평성대의 의미이기도 하고, 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뭔가에 홀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괘는 일[事, 治]로 해석됩니다. 뭔가가 고질적이게 되었을 때는 새로운 일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고괘의 물상은 위에 산이, 아래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산 아래에 부는 바람은 물건을 흩어놓아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비로소 새로운 일이 요청되는 것이죠. 괘사에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의미로 리섭대천(利涉大川)이 나옵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적폐청산!입니다. 하지만 한 마디가 더 붙습니다. "갑(甲)으로 먼저 3일 하며, 갑(甲)으로 뒤에 3일 하라"고요. 갑(甲)은 십간(十干)의 맨 처음입니다. 그런데 괘사에서는 맨 처음인 갑의 앞부터 살피라고 합니다. 처음을 떠올리면, 그 앞은 제로(0)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작은 십간의 끝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뭔가가 끝나는 것과 함께 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단전에서는 종즉유시(終則有始), 마치면 시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좋은 것 보다는 익숙한 것 위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그걸 받아들일 몸이 준비되지 않으면 탈이 나고,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일제히 적용하려 할 때는 반발이 있기 마련이죠.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이전의 익숙한 것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계승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익숙한 것이 끝나고 혼란이 가중된다 해서 그게 꼭 끝을 가리키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끝이 있으면 거기에 시작도 함께 있다는 것. 이 말은 혼란을 떠나 다른 곳에서 완전 새로 시작하는 일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상전에서는 이런 고괘를 보고 "백성을 구제하며 덕을 기르는[振民育德]" 군자가 나옵니다. 덕을 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백성이란 지금 내가 놓인 상황, 혼란스러운 때를 말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나를 구성해온 온갖 타자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을 떠나서 새로 나를 수양하고 노력할 환경은 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혼란이든 안락함이든 그 안에서 변형하고 수습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폐단이 일소되는 일은 없고, 그 과정은 더 큰 혼란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일이란 폐단을 일소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것을 걷어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고괘를 보면 루쉰의 강의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가 떠오릅니다. 입센이 쓴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가 안락하지만 계속 같은 역할을 강요하는 집을 떠나는 이야기를 루쉰이 재해석한 것입니다. 그는 노라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집을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여성의 삶이란 경제권도 참정권도 없었기에, 노라는 타락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요. 루쉰은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썩어가는 자신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대책없이 황금시대를 찬양하는 것은 무용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익숙함을 타파하느니 영원히 고생을 감내하고 심지어 그 고난을 위해 싸울거라는 것. 아 뭔가 따끔따끔 합니다^^;;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익숙함에 홀린[蠱]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자는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가는 이유를 자신을 살리지 않기 때문[不自生]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인간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수록 보존된다고 보았죠. 심지어 유가에서는 꺼리는 사사로움[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뒤로 하고 밖으로 내던지는 자신[自, 身, 私]은 어떤 상태에 고착되어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을 말합니다. 가인괘로 보면 자기 역할을 벗어난 구삼효, 고괘로 보면 익숙함에 매몰된 육사효 같은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노자는 그런 고착상태를 벗어날 때 변화와 갱신을 이루어 오래 보존되는 자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알고,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은 오래도록 사니, 하늘과 땅이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하여 자신을 앞서게 하며 자신을 밖으로 여겨 자신을 보존한다.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도덕경> 7장)
가인(家人) 괘의 물상이 재미난 것 같아요! 불이 바람으로 인해 퍼져나가는 모습! 군자의 밝은 덕이 주변을 감화하는 모습으로 상상해볼 수 있더라구요! 대상전에서 언행을 강조하는 것도 말과 행동은 우리의 밝음을 드러내고, 그것이 곧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