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주역읽기 1-7주차(4/2) 후기 및 공지
지난주부터 주역 괘를 읽기 시작해서, 이번 주는 수화기제괘와 화수미제괘를 읽었습니다. 팀주역은 그동안 64괘 순으로 괘를 읽기도 했고, 소성괘를 중심으로 읽기도 했는데, 올해는 괘의 특성을 중심으로 분류해 보고 있습니다. 괘덕과 운동성, 착종 관계에 있는 괘 등 다양한 형태로 다시 묶어 읽기를 시도하는 것이죠. 1학기는 계사전과 주역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괘들로 나름 묶은 것인데, 어떤 괘와 함께 읽는지에 따라 주역이 다르게 읽혀 이런 시도가 재미 있네요. 지난주 건곤이라는 역의 문을 연 후, 이번 주는 64괘의 마지막인 기제와 미제를 바로 붙이니까 주역의 구조가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조별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보기.....전에, 이번 주에 10주차 발표를 위한 각 조의 개요와 샘의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각 조별로 준비하고 계시리라 믿고, 샘께서 전체적으로 하신 코멘트를 좀 볼께요.
일단 이 발표를 준비하는 이유가, 우리가 하는 공부를 확장시켜보려는 것이죠. 서로 다른 부분의 공부가 부딪혀 공명이 일어나 하나의 개념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 공부의 확장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3교시의 주역 수업이 따로 노는 느낌이죠. 한 텍스트에서 완벽했던 개념도 다른 텍스트에서는 전혀 없는 이야기처럼 하는 게 우리 실정이니 말입니다. 좋은 훈련의 기회라 여기고 함께 준비해 가면 어떨까 합니다.
조별 에세이는 1학기에 공부한 <계사전>의 개념을 잘 이해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계사전의 개념 중 우리 삶의 문제와 닿아 있고, 그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으로 ‘중심 개념’을 잡아야 한다고 하셨죠. 다른 팀의 발표를 통해 계사전의 구절이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이 목표이죠. 낙천지명(樂天之命), 길흉(吉凶), 이지이종(易知易從) 등이 중심 개념으로 준비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남은 2주 할 수 있는 만큼 애써 준비해 보도록 하죠. 발표 형식도 고민해야 하고, 모여서 합도 맞춰봐야 하니까 꽤 분주한 2주가 예상되네요. 모두 파이팅입니다. 그럼 이제 기제, 미제괘 조별 토론을 볼까요?
6주차 후기<규창팀>
64괘를 순서대로 공부하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중천건, 중지곤 다음에 수화기제, 화수미제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는 우리 조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천건과 수화기제, 중지곤과 화수미제가 상통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라고 글을 써 온 학인이 있었다.
중천건의 핵심은 군자 역시 하늘(天)처럼 자강불식해야 한다는 것으로,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기제(旣濟)는 ‘모두 이룸’을 뜻으로 삼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뜻을 이루었으니 吉할 수 있으나 사람들이 乾乾하지 않으면 종말에는 亂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기제 때에도 사람들은 덕을 進益하고 業을 닦아야 한다. 기제 때의 군자도 乾의 네 가지 덕(元‧亨‧利‧貞)을 끊임없이 함양해서 위태로움과 혼란에 대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천곤과 화수미제는 어떤 점에서 연결되어 있을까. “‘未濟’가 형통함은 柔가 中을 얻었기 때문이다.”, “柔로서 中에 처함은 剛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능히 剛健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형통함을 얻는 것이다”(361) 라는 未濟의 의미가 낮추고 순히 하여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즉 만물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곤의 陰의 道와 맥이 상통하는 것 같다는 정도로 우리의 이야기를 급마무리했다.
가장 뜨겁게 토론했던 부분은, 주역이 왜 완성이 아닌 미완성의 미제로 마무리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利涉大川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대천을 건너는 것은 우리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삶은 우발의 연속이다. 우리는 완성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나 삶은 우리를 미완성태에 머물게 한다. “자연은 마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채운 샘의 말을 곱씹어 보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해진다.
생명의 진화에서는 완벽한 합치(완성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거기서는 작업과 그 결과 사이에 불균형이 두드러진다. 유기체의 아래서 위까지 언제나 일관된 단 하나의 커다란 노력이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노력은 갑자기 중단되며, 때로는 대립되는 힘들에 의해 마비되고, 때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 때문에 해야 할 일에 부주의하기도 하고, 자신이 취하려고 몰두하는 형태에 빠져 거울을 보듯이 그 모습에 도취되기도 한다.(『창조적 진화』, 198)
우리는 완성태의 상태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初吉終亂의 과정을 끊임없이 겪게 된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나 생각하자마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에도 삶에도 완성은 없다. 그렇기에 삶이 지속되는 것인가? 삶은 과정인 것이다. 바로 미제가 삶의 한 마디, 그 과정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미완성태인 미제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어봐야겠다.
6주차 후기 <황리조>
지난 시간에 건곤으로 64괘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이번 시간에 마지막 두괘인 기제와 미제 괘를 살폈습니다. 매번 힘들게 60여개의 괘를 거친 후에 마지막 미제로 마무리를 했더랬는데, 훅 건너뛰어 건·곤과 기제·미제를 맞대면시켜 읽다보니, 시간 감각이 묘하게 얼크러지는 듯한 약간의 낯섦을 경험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주역을 읽는 여러 길이 있을 수 있음을, 나아가 주역 철학이 단선적인 순환성에 기반한 시간 관념이 아니라 순환의 내부에서 또 무수히 갈라지는 생명의 시간들을 함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64괘를 닫힌 원환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시선을 이런 식의 독법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겠다는 것이지요.
각설하고... 그동안 주역 공부를 하면서 학인들이 미제 괘를 더 선호했던 거 같은데, 이번 토론에선 대부분 샘들께서 기제 괘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하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완성되고 이루어진 것보다는, 미완성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끼는 게 당연하리라 싶었거든요. 기제 괘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이같은 지향성에 대한 반발 심리라고나 할 수 있을지 싶네요. 저도 작년에 미제괘의 어린 여우를 모티브 삼아 에세이를 쓰기도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하나의 매듭으로서의 ‘기제’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더라고요. 기제인듯 미제인듯 투미했던 제 삶의 행로 또한 기제에 대한 두려움 섞인 외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은근 들었고요. 여튼, 덕분에 개인적으로도 기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문빈 샘은 공통과제에서 ‘기제(旣濟)’란 ‘각각 자기 자리에 합당함을 얻는 것’이자 흐름 속에서의 완성이기에 언제나 미완성을 함축하고 있는 어떤 상태라고 하면서, 완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우리는 흐름 속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끊임없이 점검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즉, 하나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완성을 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을 건너는 과정에서 놓친 것과 힘쓰지 못한 지점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동력까지가 기제의 몫이라고요. 기제 괘사에서 말하는 ‘초길종란’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겠고, 그런 점에서 공영달이 기제 괘에서 굳이 ‘진덕수업’을 말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제 괘의 효사들을 보면, 더더욱 기제의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구오효사는 완성의 시대답게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싶은 마음을 경계하고 소박한 초심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구삼효사에서는 은나라 고종처럼 뛰어난 군주라 할지라도 큰일을 치르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고 있고요. 여튼 모든 것이 갖추어진 때일 수록 앞서 환란을 예상하고 이를 방비하는 경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분명 기제도 맞이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해서, 그동안 기제 괘를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글고, 많은 공통과제들에서 기제· 미제괘와 베르그손의 시간 관념을 결합시켜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더랍니다. 늘 그렇듯 조심스럽게 논의들이 오갔고 이렇다하게 정리들이 안 된 채로 맺었으니, 기회되면 채운 샘께서 한번 짚어주심 어떨지 싶기도 합니다.
6주차 후기 <정옥팀>
건곤 다음 기제와 미제괘를 붙여 읽으니 주역의 구성이 다시 보이는 것 같았어요. 건괘의 창조적 에너지와 곤괘의 성물(成物)하는 생성 운동이 기제와 미제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성과 변화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주역의 이런 구조에 대해 저희 조에서는 재미있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도 주역을 처음 공부할 때 의심이 들었던 질문이라 반가웠는데요, 주역은 왜 곤괘로 끝나지 않고 미제로 끝이 나는가? 건괘로 시작했으면 곤괘로 끝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곤으로 끝나지 않고 미제로 끝나는 것이 의아하다는 질문이었습니다. 팔괘의 순서도 건태리진 손간감곤이니 건에서 시작하고 곤으로 마무리하는 구조야말로 시작과 마침이 완결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도올 선생님도 왕부지의 논의를 빌어 이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요. 만약 64괘를 곤으로 끝냈더라면 역은 변화의 우주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죠. 건과 곤은 음양의 섞임이 없이 순양과 순음으로 되어 있죠. 순음의 곤으로 끝이 난다면 영원히 끝남으로 마쳤을 거라고 말이죠. 물론 순음 안에 양의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꼭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文이 적절해야 길하다고 계사전에서 언급하는 것에 근거해. 주역 괘 중 음양의 착종이 가장 심한 것이 기제와 미제이죠. 마지막 미제괘는 마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침을 다음의 기회가 되는 변화와 운동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주역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제는 불을 떼어 밥을 짓는 것과 같이 ‘조화에 합당’해 가는 과정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효사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없죠. 특히 사효는 물이 새는 배를 헌옷으로 틀어막고 가는 상황입니다. 각 효사를 보면 완성은 언제나 불완전함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렇게라도 건넌다면 기제가 아닌가라는 이야기도 한참 나누었네요. 완결은 완결과 동시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변화의 국면에 있어야 함을 생각해 보면, 이루어짐은 곧 변화와 함께임을 알 수 있죠. 그러니 미제 역시도 건너지 못하는 부제(不濟)가 아니라 아직 건너지 않은 미제, 어떤 변화일지 모르지만 잠재적 변화로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을 나누었구요. 아울러 요즘은 완벽한 세팅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시작 자체를 두려워 한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완성이란 게 세팅이 아니라 과정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예측이나 계획이 얼마나 무소용한지에 대해서도 경험담을 나누기도 했네요.
운동과 상호연관성에 대한 재미있는 예시도 있었어요. 로봇에 관한 얘긴데요, 이족보행 로봇을 사람과 똑같이 만들면 자꾸 넘어진다고 해요 발이 너무 작아서. 그래서 로봇은 발을 크게 만든다고. 인간이 작은 발로 이족보행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근육세포들이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이지 완벽하게 설계된 비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운동성이 인간에게 오면 아마도 진덕수업이 아닐까 했는데요, 덕을 진익하고 업을 닦는 것을 초길종란 앞에 조건절로 붙여 계속 자신을 탐구하고 진익하는 과정으로 기제를 본 공영달의 해석도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완성에 대한 상을 깨주어서인지 할 얘기가 무척 많았는데 전 올해 기제괘의 새로운 해석을 보게 되어 무척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 7주차(4/2) 공지입니다 ***
* 읽을 괘 : 택산함, 뇌풍항, 중뢰진, 중산간
* 과제 : 괘 안에 내포된 다양한 운동성에 주목해 읽으시고 간략한 메모를 써서 과제방에 올려주세요.
♣ 간식 : 지영샘, 미연샘께 맛있는 거 부탁드려용~~ㅋㅋ
♣ 후기 : 황리샘
그럼 일요일에 즐겁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