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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무려 네 개입니다. 택산함(澤山咸 ䷞), 뇌풍항(雷風恒 ䷟), 중뢰진(重雷震 ䷲), 중산간(重山艮 ䷳). 공통점을 말해보자면, 네 괘 모두 진(震)괘와 간(艮)괘가 있습니다. 정옥샘이 올리신 과제 공지를 보면 '괘 안에 내포된 다양한 운동성에 주목해' 읽으라고 하셨죠.ㅋㅋ 공교롭게도(?) 진(震)의 덕은 동(動)이고 간(艮)의 덕은 지(止)입니다. 그야말로 동정(動靜)의 괘가 한 세트씩 있는 것입니다.
진(震)괘와 간(艮)괘, 두 괘의 덕은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 진괘는 '우레'라는 이름처럼 이것저것 건드리면서 민첩하게 움직일 것만 같고 간괘는 '산'이라는 이름처럼 무겁게 서 있을 것만 같죠. 그런데 진괘의 괘사는 움직일 때는 모름지기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처럼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일이 잘 이루어질 거라고 하죠. 진괘는 이 조심스러움, 두려움[恐]을 강조합니다(단전에서는 "두려워하는 것은 복을 이루는 것[恐致福也]"이라고 말하죠). 왕필이나 공영달은 공(恐) 게으름을 경계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게으름이라고 하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고 행동이 굼뜬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진괘의 대상전을 보면 군자가 진괘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한다[恐懼脩省]" 라고 합니다. 행동이 느린 것에 대한 수양과 반성은 아니겠죠. 정이천은 "안으로 나 자신을 진동하는 것이지 밖으로 남을 진동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를 달았습니다. 게으름이란 타인과 비교를 통해 판정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게으름은 부동(不動)을 말하지 않습니다. 움직임[動]이 덕인 진괘에서 게으름이란 그 과정에 집중하고 충실하지 않고 관성대로 행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성적인 행동, 타협적인 생각, 상식에 머무는 태도 같은 것들은 아무리 빠르더라도 공(恐) 해야 하는 게으름인 것이죠. 간괘는 이 게으름을 경계하며 모든 과정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야 오히려 제사는 매끄럽게 행해질 수 있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요. 이렇게 보면 움직임[動]이 덕인 진괘에는 계속 자신을 돌이키고 사려하는 멈춤[止]의 덕이 병존하고 있습니다.
간괘의 경우는 어떨까요? 간괘의 괘사는 사실 척 보면 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등에서 멈추면 몸을 얻지 못하며 뜰에 가서도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을 것이다[艮有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등은 뭐고 뜰은 뭔지, 멈춤의 괘인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되죠. 이번에 읽은 한강백과 공영달은 재밌는 해석을 했는데요, 등[背]을 눈[目]과 대비시킨 것입니다. 눈[目]은 보는 감각기관입니다. 봄은 여러 사물을 받아들이고, 물욕이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눈에는 한계가 있죠. 한강백은 이를 '눈의 근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간괘는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등에서 그칩니다. 때문에 한강백은 "눈에 근심이 없는 것"이라고 주를 답니다. 눈에 한정적으로 보이면 모를까, 아예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물욕이 일지 않게 되는 것이죠. 괘사에 나온 뜰[庭]은 매우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정이천은 "매우 가깝지만 보지 못하니 외물과 접촉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면 욕심이 싹트지 않아 멈춤의 도를 얻을 수 있다"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애초에 만나질 않으니 욕심이 일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간괘는 비색한 괘이기도 합니다. 사물이 서로 등지고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죠. 근심도 없지만, 통함도 없다...그래서인지 간괘의 괘사에는 형(亨)이 없습니다.
하지만 괘사는 무구(无咎)로 끝납니다. 단전에 따르면 이 허물없음[无咎]은 때[時]를 알기에 가능합니다. "그쳐야 할 때 그치고 가야 할 때 가서 움직임과 고요함에 그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가 밝게 드러난다[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 공영달에 따르면 "모든 물건의 동하고 정함은 본래 각기 시운(時運)이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멈추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닌 거죠. 이때를 적절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멈춤의 도는 시중(時中)의 문제인데요, 이 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 맹자(孟子)는 시중(時中)의 문제를 여러 훌륭한 사람들을 소환해서 비교합니다.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절대 함께 하지 않았던 대쪽 같은 백이(伯夷), 등용되든 쫓겨나든 의연했던 유하혜(柳下惠), 그리고 벼슬 할만하면 벼슬하고 떠날만하면 떠났던 공자(孔子). 맹자 왈, 이중 시중한 군자는 공자뿐이라고 합니다만^^,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윤리를 발명하고 관철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나면서 자신을 잃을 정도로 연연해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맹자가 공자를 높이 친 이유는 셋 중 가장 때[時]에 밝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공자는 나아가고 물러남의 때를 잘 읽고 그에 맞게 행동했죠. 어떤 때는 익지도 않은 쌀을 냉큼 챙겨 나갈 정도로 서둘러 물러나기도 했습니다[接淅而行]. 이렇게 보면 멈춤의 도란 언제나 동(動), 그것도 기민한 움직임을 동반합니다. 멈춤은 다시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면서도 멈춰야 할 때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1
함(咸)괘와 항(恒)괘는 <주역>의 시작인 건곤(乾坤)과 함께 봐야 합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건곤은 조화의 근본이고, 함괘와 항괘는 인륜의 근본입니다. 함괘에서 이질적인 두 기운이 감응하여 서로 접속하고 변화한다면, 항괘는 그 만남의 지속을 말합니다. 그런데 감응이라고 해서 함괘가 누구나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남녀의 감응을 말하기도 하는 함괘는 괘사에서 "여자를 취해야 길하다[取女吉]"라며 콕 짚어 누구랑 감응해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단전은 여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남자[男下女]를 말합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이 구절은 여자를 취하는 법을 말하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낮추고 구애해야 성공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예에서는 신랑이 손수 수레를 몰며 신부에게 자신을 낮췄다고 합니다. 당시 예법은 단순한 에티켓이 아니라 사람들이 천지자연의 운행에 응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낮추는 건 그냥 잘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강(剛)으로서 스스로를 유(柔)에게 낮춰 천지의 감응하는 운동을 체현하고자 한 것이죠. 자신과 응할 상대를 식별하고, 자신을 낮춘다는 적절한 예를 행하기. 이는 함괘의 내괘인 간(艮)괘의 시중(時中)을 떠오르게 합니다. 어지럽게 여러 가지를 보고 동하는 게 아닌, 자신이 응할 동류(同類)를 알아보고 감응하기.
만남의 지속 항괘는, 단전에 따르면 오래함[久]입니다. 뇌풍항. 우레와 바람이 몰아치는데 이것들이 오래갈 수 있을까요? 함괘가 소남과 소녀, 어린 남녀의 감응이라면, 항괘는 장남과 장녀의 보다 결속력 있는 결합입니다. 부부의 괘라고도 하죠. 우레와 바람이 제멋대로 불어닥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계속 함께 하고, 또 나름의 규칙을 만들며 응하고 있습니다. 단전은 "해와 달이 하늘을 얻어 오랫동안 비추며, 사시(四時)가 변화하여 오랫동안 이루며, 성인이 그 도를 오래하여 천화가 교화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항상됨[恒]=오래함[久]이란 이미 이루어져 굳어진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으로 이야기 합니다. 항괘의 대상전은 "군자가 보고서 우뚝 서서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한강백은 대상전에 대해 "오래 할 바를 얻었기에 바꾸지 않는다"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해와 달, 사시의 운행처럼 끊임없는 운동성에 오래함이 있다는 걸 알기에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항괘의 내괘인 진(震)이 말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신중한 태도처럼.
네 괘를 늘어놓고 보니까 동정(動靜)이 서로를 함축하고 있으며, 끝없이 나아가는 운동도, 완전히 끝나버린 멈춤도 없다는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자는 서로 상반된 것이 상호간을 함축하고 있다는 말을 엄청 많이 했는데요, 그중 유명한 건 은미한 밝음[微明]을 말한 36장입니다.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不可以示人
장차 축소시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퍼주어야 하고, 약하게 하고자 하면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 하고, 쓰러뜨리려고 하면 먼저 일으켜 주어야 하며, 장차 빼앗으려고 하면 먼저 주어야만 하니, 이것을 일러 은미한 밝음이라고 한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니,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날 수 없으며, 나라의 이기(利器)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노자> 36장)
이 구절은 이기(利器)를 경계하는 말로 끝납니다. 상반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 상대적일 뿐이라고만 말한다면, 허무할 뿐이겠죠. 노자는 지금 드러난 것, 그러니까 강하고 날카롭고 다른 누군가를 제압하는 것에 집착할 때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합니다. 드러난 일이 어떻게 그 일이 아닌 것과 함께 있는지를 보기. 그것을 노자는 은미한 밝음이라 했고요. 이것을 <주역>식으로 말하면 사물의 변통(變通)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