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중수감(重水坎 ䷜), 중화리(重火離 ䷝), 중풍손(重風巽 ䷸), 중택태(重澤兌 ䷹)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넷 다 중첩괘입니다. 64괘를 구성하는 소성괘의 절반을 알아보면서 그것이 중첩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는 등 바쁜 토론 시간을 보냈네요. 역시 괘 네 개는 너무 많다! ㅋㅋㅋ 이중 하나만 잡고 후기를 써 보겠습니다. 중수감괘입니다.
한 가지 모습이 아닌 물
중수감괘는 소성괘 감(坎 ☵)괘가 중첩된 괘입니다. 감(坎 ☵)은 위와 아래 모두 음효이므로 겉은 부드럽지만 그 안은 밝고 굳센 양효로 되어 있죠. 왕부지는 소성괘 감(坎)에 대해 물이란 형체는 굳세지만 작용은 부드러워 실로 그 기미를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물의 형태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마시는 물도 물이지만 온도와 환경에 따라 얼음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등 계속 모습이 바뀝니다. 물의 부드러운 작용은 갖가지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리키는 거죠.
감(坎 ☵)괘의 중간에는 양효가 있습니다. 이는 유약한 물이 갖춘 성실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고 강물이 지형을 바꾸는 것처럼, 물은 굳건한 믿음과 정성이 있기에 가장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노자는 세상에서 가장 유약한 물이야말로 강건함을 이길 수 있으니, 올바른 말은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天下 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 正言若反, <도덕경> 78]. 견강(堅剛)함은 깨지기 쉽고 일시적인 반면 부드러움은 물처럼 유연해 깨짐이 없고 오래 보존됩니다. 이를 <주역>에서는 소성괘 감(坎, ☵)의 형상으로 보여준 게 아닐까요.
험난함은 써야 한다
감(坎 ☵)이 중첩된 중수감괘(重水坎 ䷜)는 물이 거듭 흘러 이르는[水洊至] 상입니다. 괘사에서는 그런 거듭됨을 습(習)이라는 글자로 표현합니다. 습(習)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듭하다[重]’로, 소성괘 감의 중첩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익히다[便習]’입니다. 감(坎)은 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구덩이에 빠진 험난한 상황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험난한 상황에 빠진 경우, 일단 자신이 어디에 빠져 있는지 익혀야 합니다. 주에서 말한, 익숙해질 때까지 익힌다는 편습(便習)이라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험난함을 몸에 붙여야 한다는 건, 그게 일시적이고 돌발적이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살면서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고, 상존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그걸 익혀는 수밖에 없다고 감괘는 말하는 게 아닐까요.
더 나아가, 감괘는 험난한 일을 익혀서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험난함은 넘어설 수 없고, 땅의 험난함은 산과 강 그리고 언덕과 구릉이다. 왕공은 위험물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니, 험난함을 사용하는 때의 작용이 크구나[天險不可升也 地險山川丘陵也 王公設險以守其國 險之時用大矣哉]!" 여기서 험난함은 뭔가를 보존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대륙을 호령한 몽골제국이 유일하게 건너지 못했던 게 바다였죠. 물은 가장 부드럽지만 그런 물로 뒤덮인 바다는 변화무쌍하고 그 속에 뭘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험난한 장소입니다. 이런 험난함을 이용할 줄 아는 왕은 굳이 성을 험지에 짓거나 성 주변에 해자를 파서 스스로를 보존합니다.
공영달은 험을 사용하는 때의 작용[險之時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습니다. "하늘의 험함과 땅의 험함은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된다. (...) 만약 교화가 흡족하여 나라가 편안하게 다스려져서 안과 밖에 화목하면 험함을 쓸 때가 아니요, 만약 나라와 집안에 근심할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험함을 만들어 방지해야 한다." 험함을 만들기까지 해야 한다는 공영달의 말은 살벌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어쩐지 외환(外患)을 만들어 내우(內憂)를 방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하늘과 땅의 험함이 계속 있는데, 인간세에 안팎의 화목함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항상 요철투성이고, 지금 내 마음만 해도 계속해서 변하는데 말이에요. 결국 있는 건 험함의 연속뿐 아닐까요? 만약 안팎이 화목하고 그게 계속되는 것 같다면, 그건 뭔가를 무마하거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험난함은 무마하거나 없는 척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삶이라는 우환을 생각할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험난함은 피할 게 아니라 익히고 써야 한다!
유심형(維心亨)
중수감괘의 괘사는 믿음과 마음의 형통함과 행동을 말합니다. "습감에는 진실과 믿음이 있어서, 오직 마음이 형통하니, 나아가면 가상함이 있다[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 험하다고 굳어 있으면 안되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감괘의 물상인 물은 멈춤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공자는 물을 보고 "밤낮을 쉬지 않고[不舍晝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불사주야, 자강불식은 양의 힘입니다. 강중함을 품었기 때문에 물은 깨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거죠.
노자는 최고의 선을 물에 비유합니다. <도덕경> 8장 상선약수(上善若水) 장입니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물의 쉬지 않음을 강조한 공자와 달리 노자는 물의 부드러움, 낮은 데로 흐르는 겸양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고, 싸우지 않고...이러니까 마치 노자가 말하는 물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그래서 '착하다[善]'라는 말이 붙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자는 상선약수 장에서 선(善)이란 얼마나 때에 맞게 처할 수 있는 능력인지를 보여줍니다. 거할 때는 낮게, 마음은 고요하게, 어울릴 때는 인자하게, 말은 믿음직스럽게, 다스림은 바르게, 일은 능란하게, 움직임은 때에 맞아야 한다. 이때의 선(善)은 '착하다'가 아니라 '잘하다'에 가까울 거 같습니다. 위험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게 아니라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때에 맞는 윤리를 구성하는 거죠. 이런 점은 감괘에서 말하는, 강중함을 품어 마음이 형통하다는 "유심형(維心亨)"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남들 다 싸우는 상황에서도 싸움 외 다른 길을 내고, 남들이 다 싫어하는 곳에 처하면서도 편안할 수 있는 건, 물이 강중함을 품었기에 드러나는 선의 양상인 것이죠.
중수감괘 대상전에서는 물의 끊임없이 흐르는 강중함을 관찰한 군자가 "덕행을 일정하게 지속하고, 가르치는 일을 반복해서 익힌다[常德行, 習敎事]"고 합니다. 왕부지는 '상덕행'을 물처럼 이미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을 달마다 다시 검토하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습교사'는 과거의 것들을 익숙하도록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알아내는 거라고 합니다. 험난함을 익숙하게 한다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계속 돌아보고 검토하는 태도를 유지하기. 그러기 위한 내면의 사투가 드러나는 방식은 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이라고 감괘는 말하는 거 아닐까요.
감을 험난함으로 읽는 것은, 감괘 자체의 험난함 보다 물처럼 대하라는 의미로 보이지요? 돌부리를 만나도 넘어가고, 산을 만나도 돌아가는 지혜를 말하는 것 같아요. 노자가 상선약수를 말하며 다투지 않음(不爭)에 주목하는 것도 무엇을 만나든 다투기 보다 '잘' 겪어내는 감괘의 성질을 설명해주는 것 같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시나 역경은 노장이나 유가를 비롯한 중국 사유의 원류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고, 마지막 '상덕행 습교사'에 대한 왕부지의 해석도, 감괘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싶네요. 무엇보다 혜원의 주역 공부가 물처럼 서서히 구덩이를 채워가고 있는 현장을 확인하는 듯하여, 너무 기쁘게 읽게 되네요. 주역 학인들께서 열독하심 좋을 듯 하여요^^
우와! 읽을수록 감동적이고 곱씹어보게 되는감괘에 <도덕경>구절까지 더해서 글을 써주시니 감동 뽀인트가 배가 되네요.
"험난함을 몸에 붙여야 한다는 건, 그게 일시적이고 돌발적이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살면서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상존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그걸 익혀는 수밖에 없다고 감괘는 말하는 게 아닐까요."
험난함의 때에는 험난함을 몸에 붙여 익숙하게 될때까지 마음을 다해 행하는 감의 강중하지만 부드러운 역량이 마음을 울리네요. 확실히 혜원샘이 그동안 주역부터 중용, 도덕경까지 암송하며 몸에 붙이고 쓴 글이라 더욱 그런것 같아요. 곱씹으며 여러번 읽을게요. 감솨해요!
혜원쌤의 중수감괘 이 후기를 몰래 들어와 몇 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수시로 들어와 읽고 또 읽고 갑니다. 읽을 때 마다 맑은 물로 씻어 내린 듯 내 마음이 편안해 지고, 공부가 됩니다. 혜원쌤의 깊어가는 공부에 존경과 박수를 보냅니다. 오랜만에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