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려움과 탐욕, 그리고 미신과 예언
이번 학기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서문~2장을 읽고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서문에서 사람들이 왜 미신에 빠지게 되는가 하는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의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행운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이는 탐욕이죠. 이 두려움과 탐욕으로 인해 대중은 희망과 공포를 왔다갔다 하며 미신에 빠지게 됩니다. 불운은 피하고 행운을 바라며 기도와 눈물로 신의 도움만은 요청할 뿐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운의 원인을 탐구하지 못하게 된 인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의 영감과 부추김에 의한 것이라고 믿게 되고 확실한 것을 말해주는 점술사를 찾아가 의지하게 됩니다. 고대부터 계속 이런 일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했죠.
점술사는 초월자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자입니다. 주역에서도 운명이 걸린 큰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시풀로 점을 치게 되는 것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다는 면에서는 일정 정도 궤를 같이 합니다. 요건 앞으로 계속 얘기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쨌든 끊임없이 일어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주치면서 두려움은 증폭되지만 그 사건들을 여러 인과들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도를 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어쨌든 빨리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에 예언가를 찾고,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말에 쉽게 빠져듭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은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탐욕이며 결국 광기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대중에게 미신보다 더 유력한 지배자가 없다.”(16쪽) 이 광기는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나 억압을 욕망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스피노자 시대에 공화파를 난폭하게 죽인 대중들, 히틀러의 파시즘에 열광한 민중이 그들입니다.
이 미신적 광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욕망을 억누르거나 금지함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재의 요건에 대한 원리적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하학이나 수학적 방법처럼 하나하나 차근차근 원리를 따져가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과 자신의 정념을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학에서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이 하나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처럼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만물의 작동원리, 정신의 메카니즘, 신체의 메카니즘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과정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두려움과 광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감정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건의 원인으로부터 사건들을 이해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할 때, 무지에 휩싸이게 되고 그 무지를 파고드는 게 사제와 교회권력, 또 교회권력과 결탁한 정치권력입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가 비교적 크게 보장된 네덜란드에서도 무지를 벗어나 철학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제와 교회는 자신들 멋대로 성서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해석을 신의 의도와 계시라고 하며 대중을 속이고, 자신들이야말로 신과 대중을 매개하는 존재라고 하며 대중들 위에 군림하며 고관대작 행세를 하고 돈을 끌어 모읍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의 예언을 전하는 메신저처럼 행동합니다.
스피노자는 예언, 또는 계시는 신이 행하는 기적 같은 것이 아니고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어떤 문제에 대한 자연적 인식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나 초월자가 아니라 자연입니다. 성서에서 신의 예언으로 제시되는 일들은 예언자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인데, 성서의 예언가들은 표상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일 뿐입다. 예언가란 뭘까요? 스피노자는 “신의 계시를 해석해 주는 사람”(25쪽)이라고 한다. 당시 헤브라이말로 예언자는 ‘나비(nabi)’라고 하는데 당시 nabi란 이야기하는 사람, 해석자라고 합니다.(nabigate란 말이 떠오릅니다) 예언가라 불리는 모세, 사무엘, 이사야 등등에게 신은 그들 각자의 기질과 표상의 본성, 그가 예전에 가졌던 믿음들에 따라 신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군인인 여호수아에게는 군대를 지휘하는 칼을 가진 천사로, 이사야에게는 용상에 앉은 신성한 존재로 나타났고, 시골 사람이면 수소들과 암소로 나타난 거죠. 이들은 철학적 사변 능력과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들은 계시 자체를 통하여 신의 계시를 확신했던 것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징표를 필요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면 또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이 다음 3장으로 이어집니다.
<<신학 정치론>>의 문을 열면서 미신과 예언, 이 흥미진진한 주제에 대해 여러 얘기들을 나누며 짧은 시간의 토론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무지하게 많으니 앞으로 계속 책을 읽으며 “자연적 인식이 곧 예언”(25쪽)(예언은 자연이 보내주는 신호다)임을 이해해 보기로 했습니다.
확실히 신학정치론을 읽으면 왜 이 책이 당시에 금서로 재판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을 초월적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특정 인물들의 특권으로 남겨 놓을 수 없다, 예언은 자연의 목소리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단지 신체 변용으로부터 비롯된 표상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이야기는 지금 봐도 엄청 도발적입니다. 에티카와 달리 너무나도 뜨거운 스피노자의 문체에 저도 같이 울컥하는 포인트들이 몇 있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건 예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교회의 절대적 권위였죠. 그 당시 교회는 예언을 올바른 삶을 위한 도덕적 가르침으로 두지 않고, 스피노자가 보기에, 자신들의 특권을 위한 수단으로 전유하면서 종교의 역할 자체를 변질시켰으니까요. 정치를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적인 것을 다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정치를 얘기하기 위해 무엇을 문제 삼아야 할까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읽으면서 매번 반복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