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지뢰복(地雷復 ䷗)과 천풍구(天風姤 ䷫)입니다. 초구효가 아니었으면 순음이었을 복괘, 초육효가 아니었으면 순양이었은 구괘를 한쌍으로 놓고 보니 음과 양의 운동성에 대해 비교해 볼 수 있었습니다.
복괘는 괘 이름이 '돌아옴[復]'입니다. 있어야 할 게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지요. 반면 구괘는 음유함이 양강함을 우연히 만났다[遇], 임시적이고 잘못된 만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양(陽)중심주의자 왕부지는 괘들에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양과 음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양은 발현하는 운동성인데 반해 음은 고요히 숨어서 제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도의 큰 원칙이라고요. 때문에 초효가 양인 괘에 생동하는 '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초효가 음인 괘에는 음이 가만히 있다 양들과 조우하는 '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죠. 아니 그럼 음은 양의 운동을 기다리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양을 중심으로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주희는 복괘가 천지의 마음을 보여주는데, 그 마음이란 만물을 낳는 마음[生物之心]이라고 해석합니다. 천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 낳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걸 양효의 돌아옴으로 복괘는 표현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강백과 공영달은 왕필의 해석을 가져와 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아무리 양이 낳고 낳는 생명력이라 해도, 단독적으로 펼쳐질 수는 없습니다. 한강백과 공영달에게 복괘의 '회복'은 '근본으로 돌아옴'으로 봅니다. 만물의 움직임의 근본은? 고요함이고, 있음의 근본은? 없음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복괘의 양효 하나는 음을 뚫고 올라가는 독자적인 운동성이 아닌 음에 의지하여 현실화되는, 음의 또 다른 면이자 잠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노자가 모든 반대되는 척도는 사실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노자는 만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고, 그 뿌리는 다름아닌 고요함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노자> 16장).
致虛極 守靜篤 萬物並作 吾以觀復 夫物芸芸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완전히 비우고, 아주 조용함을 지키라. 만물이 다 함께 자라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되돌아감을 보나니, 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로 다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니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한다고 하고, 명을 회복하면 영원하게 되며 영원함을 알면 밝다고 하나니, 영원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영원함을 알면 통하게 되니, 통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같게 되고, 하늘과 같으면 도를 얻게 되며, 도를 얻으면 오래갈 수 있으니, 평생 위태롭지 않게 된다. (<노자> 16장)
그런데 근원이라든가 뿌리라든가 하는 걸 들어도 잘 와닿지 않습니다. 뭘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 걸까요?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걸까요?
복괘는 물상으로 보면 우레가 땅 아래 있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번개가 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합니다. 이게 완전 틀린 말도 아닌 게, 번개는 식물에게 질소를 공급해 양분을 공급하는 작용을 합니다. 우레가 땅 속에 있는 건 그야말로 역량을 발휘할 곳을 찾아간 거나 다름없지요. 우레의 운동성이 땅과 결합해 새로운 화학작용을 일으켜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양은 단지 소인들을 물리치는 군자가 아니라 만물을 낳는 생명의 힘으로 돌아옵니다.
구괘는 복괘와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우선 구괘의 하나뿐인 음은 끌어당기고 관계맺고 융합하고자 하는 힘으로서 다섯 양을 만납니다. 음양이 만나는 것이니 기본적으로 사물이 밝게 드러나게[品物咸章] 됩니다. 하늘과 땅이 만났으니 만물이 당연히 화생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런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음이 하나뿐이고 지금 막 미약한 채로 생겨나서 다섯 양을 만났기 때문에 우발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를 구괘 괘사에서는 '여자가 장성하다[女壯]'로 표현합니다. 다른 것에 끌리고 융합하는 음은, 다른 것과 자신을 동일시한 나머지 역량을 펼칠 자리를 이탈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올바른 만남이 아닌 우발적인 만남만을 거듭하게 되겠죠. 그래서 구괘 초육효는 하나뿐인 음이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꽉 매어둘 것을, 대상전은 바른 법령을 세우고 공표할 것[施命誥四方]을 당부합니다. 단전에서는 중정(中正)한 만남을 강조하고요.
사실 이렇게 써도 복괘와 구괘이 보여주는 음양의 운동성을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네요. 여전히 음양의 대대관계를 설명하기 어렵고, 왜 근원으로 돌아감과 잘못된 만남인지^^ 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구괘의 음은 만남의 기회가 많을수록 바른 자리를 딱 잡고 있어야 하고 복괘의 양은 어떻게보면 생명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너무 멀리 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늘 단속해야 하죠. 이로써 음양의 만남과 만물의 화생은 장구할 수 있고 운행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