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철학 2학기가 시작됐습니다~ 한 주 달콤한 방학이 지나니 여름이 왔네요. ㅋ 파릇파릇한 기운으로 2학기도 파이팅입니다!
먼저 다음 주 공지부터 할게요. 산지박괘(山地剝卦)와 택천쾌괘(澤天夬卦)를 읽어 오시면 되고요. 간식은 영주샘과 현정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옥조
순양과 순음의 괘에 각각 음 하나와 양 하나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천풍구와 지뢰복.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반전의 계기를 보여주는 커플이다보니 맞대면시켜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괘사나 효사들을 보면 비교나 대조의 건덕지를 찾기가 어려워 논의를 진척시키기 어려웠는데, 또 오히려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먼저, 둘 다 아래에서 새로운 기운 하나가 움트는 괘들인데 왜 양의 등장에 대해선 잔칫집 분위기인데 음의 귀환에 대해선 삼엄하기 이를 데가 없는 건지, 확실히 주역은 두 힘을 다 긍정하면서도 양의 힘에 생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 여기에 음이란 현실화의 측면의 반영하는 것이니 만큼 응당 엄격한 경계와 절제가 요구되기에 ‘쇠고동목에 잡아매라’는 식의 주의의 말이 붙었을 것이라거나, 靜의 시간이 찾아오는 때이니만큼 날뛰고 싶은 마음을 붙들어매는 것이 자연의 변화에 부합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라는 논의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음 하나의 등장에 ‘만남(姤)’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에 대해서도, ‘姤’에 ‘女’가 들어 있으니 만남이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살려서 괘에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는 이야기들이 좀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만남’이라는 것과는 다른데, 그건 분명히 알기가 어렵다는... 그리고, 이 괘를 효들의 배열로 읽을 때와 소성괘들의 결합(乾과 巽)을 통해 접근할 때, 그 의미의 낙차가 큰데 그 갭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요.
지뢰복 괘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된 것이 ‘복괘에서 천지지심을 볼 수 있다’고 한 단전의 말씀이었습니다. 분명 정이천을 비롯한 유가적 해석에서는 ‘천지지심’을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왕필과 공영달의 경우는 이를 노자적 측면에서 ‘적연부동’한 ‘지무(至無)’의 상태로 보고 있다는 것. 음들의 세상에서 양 하나가 힘있게 올라오는 효의 배치로 보면 유가적 해석이, 우레가 땅 속에 잠복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노자적 해석이 좀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비슷한 듯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두 관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에 적용해햐 할지는 앞으로 긴 공부의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괘나 복괘의 효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간의 관계나 그것들이 갖는 현실적 의미 등에 대해서도 재밌는 이야기들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규창조
다음에 읽을 산지박괘와 택천쾌괘에서도 반복될 이야기겠지만, 아무래도 아직 주역에서 음과 양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많은 해석이 음을 소인으로, 양을 군자로 치환하면서 음과 양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게 천풍구괘와 지뢰복괘를 읽을 때도 느껴졌는데요. 음 하나가 자라난 구괘는 소인이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형성하는 시기로 보고, 쉽게 조급하게 굴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할 것을 매우 강조하죠. 반면에 양 하나가 자라난 복괘는 양 하나를 어떤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력 같은 것으로 말하면서 모든 것에 내재된 생명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가를 강조합니다. 똑같이 한 효가 자라난 상황인데, 음은 경계하고 양은 희망적으로 얘기한다는 점에서 위계를 두는 건 아닌가 하지만, 이런 게 음과 양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혼란스럽습니다. 아마 박괘와 쾌괘를 읽을 때도 이런 혼란을 겪을 텐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일단 토론에서는 복괘와 구괘를 운동의 차원에서 보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우선 복괘에 대해서는 현실화된 것을 가능케 하는 어떤 운동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복괘는 아무래도 양효 하나를 해석하는 게 중요한데요. 많은 해석자들이 그것을 자라나는 것 혹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하죠. 공영달과 정이천은 복괘에서 자라난 양효 하나를 각각 적연지무(寂然至无)와 생물지심(生物之心)이라고 해석하면서 근원적 운동성과 연관된 것으로 말합니다. 토론에서는 복(復), ‘돌아옴’이란 글자는 ‘없던 게 생겨난다’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 생명력이 반복된다’는 내재적 역량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단 얘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구괘는 음효 하나가 나머지 다섯 양효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타성에 젖지 않는 만남,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만남을 고민하는 걸 강조합니다. “물용취녀(勿用取女)” 구절이 그걸 보여주죠. ‘여자를 취하지 말라’기보다는 이미 음과 양이 만난 상태에서 자신에게 반가운 존재에게 너무 성급하게 이끌리지 말라는 건데요. 음효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얘기하기보다 음과 양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음에 대해 배타적으로 보지는 않는데요. 그럼에도 왜 음과 양의 만남에 대한 신중함이 양 하나가 자라나는 괘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지, 음 하나가 자라는 것에서는 약동하는 생명력 같은 것이 얘기될 수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깔끔하게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정랑조
저희 조에서는 복(復) 괘에서 “근본으로 돌아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주역>에서는 복(復)의 의미, 양(陽) 하나가 생겨나는 것의 의미를 “근본으로 돌아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뿌리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걸까요? 아니면 시작점 또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걸까요? 저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내가 왜 하고자 했는지 그 마음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근본을 잃어버리는 때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일이 진행되면, 일을 진행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또는 우발적인 상황들에 급급하게 대응하느라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건 그러한 경우에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구(姤) 괘에서는 이 ‘만남’을 어떤 만남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음(陰)이 하나, 양(陽)이 다섯의 만남을 <주역>에서는 한 여자와 다섯 남자의 만남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녀로만 해석하는 게 아니라 시대적인 상황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음(陰)을 소유하고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섯 양(陽)을 경쟁하고 비교하는 마음으로요. 이렇게 보면, 지금 자본주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지 않나요?
음을 해석하는 게 옛 학자들도 어려웠던 것 같아요. 음을 근본으로 보는 노장 계열의 해석과, 세상에 物이 있음은 움직임(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動中靜, 動中動으로 해석하는 유학의 입장이 있는 걸 보면요. 음의 다양한 해석이 필요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