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윤리학의 목표는 예속에서 자유로, 즉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수동과 능동을 작용을 겪느냐 가하느냐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고 또 다른 실재들을 변용함으로써 실존하는 존재이므로 수동과 능동을 재정의 한다. 수동은 우리가 우리의 어떤 행위에 대해 부적합한 원인, 즉 부분적인 원인인 경우이고 능동은 우리가 우리 행위에 대해 적합한 원인(내가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때)이라고 한다.
정서를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능동적인 정서로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 능동적 정서로 살아가는 방법으로 계사전에 이용안신(利用安身)과 존신(存身)이 유사하게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주역을 읽는 이유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놀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수동적으로 길흉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괘사와 효사를 곧이곧대로 따르면서 성인의 말에만 의존한다면 부적합한 인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있어서 효를 해석하는데 주저하게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후기를 쓰겠다고 지난 시간을 되새김 하면서 스피노자와 계사전 사이에서 조원들이 자신의 질문을 발표하고 서로의 의견에 질문하고 설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였다.
두서없는 스케치 민망하다.ㅜ
**다음 시간에는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1~2장을 읽어 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행위에 대해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때 능동적으로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성인이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린 이성적으로 어떤 이치를 궁구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행위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 신체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기적과 놀람을 원하고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해주길 욕망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이런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이게 될까 싶지만, 수동과 능동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원인에 의해 행위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얘기겠죠. 그래서 마지막에 3종 인식도 얘기하고, 모든 고귀한 건 드물고 어렵지만 할 수 있다고 한 거겠죠. ㅋㅋㅋ
어쩐지 인간의 역량을 믿는다는 점에서 계사전과 같은 지반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길흉을 겪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길흉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로부터 성인 군자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니까요. 스피노자와 함께 읽으니 아주 뽕이 넘치는 시간입니다 ㅋ
능동과 수동에 대한 재정의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능동과 수동을 항상 외부의 작용에 의해 움직이느냐, 내부의 작용으로 움직이느냐로 봤는데. 그게 아니라 부적합한 관념으로 행하느냐, 적합한 관념으로 행하느냐에 따라 능동과 수동을 구분해주어서 능수동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스피노자와 계사전에서 공통적으로 능동적인 삶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놀람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길흉의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길을 계속 탐구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