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64괘의 핵심인 건(乾)괘와 곤(坤)괘를 함께 읽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건곤은 그야말로 역의 문(門)인데, 문짝 하나하나가 너무 무거워요. 다른 괘에는 없는 문언전이 붙어 있고, 특히 건괘에는 효 해석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다보니 본문과 주석을 함께 읽다보면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길을 잃기 일쑤거든요. 효(爻) 여섯 개를 수월하게 읽었다 싶으면 갑자기 단전과 대상전과 소상전이 몰아치고, 아까 본 말 같은 게 다시 나오고. 처음 읽었을 때는 어찌나 헷갈리던지^^! 그럼에도 이 부담스러운 두 괘를 같이 읽어야 하는 이유는, 건과 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건과 곤, 하늘과 땅, 강과 유. 양과 음. 이 두 가지 힘은 서로를 함축하고 보완하며, 어느 하나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건괘와 곤괘의 괘사, 효사가 등속관계에 있다고 말했죠. 처음을 근본으로 하는 건괘와 이루어진 형체를 근거로 하는 곤괘는 만물의 시작과 생장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공영달 주의 특이한 점은 건괘와 곤괘를 체용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왜 천(天)이 아니고 건(乾)이며, 지(地)가 아니고 곤(坤)일까. 이는 전자가 형체의 이름이고 후자가 운융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인간이 하늘과 땅의 형체가 아닌 그 용(用)을 본받게 하고자 그렇게 명명했다는 것이죠. 하늘은 강건하고 땅은 순합니다. 건이 이끌고 곤은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곤괘가 부차적이고 건괘가 본원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공영달은 "음은 낮고 물러감을 주장하니, 만약 일의 뒤에 있어서 물건의 먼저가 되지 않으면 바로 주장함을 얻는 것이니 이는 음의 떳떳한 이치"라고 하며, 곤은 음유하고 순하며 뒤따르기 때문에 만물을 실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인은 앞서나가고 만물을 이루어나가는 건과 함께 뒤따르고 마무리하는 곤괘의 바름을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로써 어떤 일이 실현되는 지점에는 반드시 그것의 바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謂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혼돈 속에 생성된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니, 고요하고 텅 빈 채, 우뚝 서서 변하지 않으며, 두루 행하여 멈추지 않아서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일부러 자(字)를 부여서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을 지어 대(大)라고 한다. 커지면 떠나가고, 떠나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도 크다.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은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땅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곤괘의 육이효는 직방대(直方大)입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직(直)은 물건을 낳음에 간사하지 않음, 방(方)은 땅의 형체가 안정됨, 대(大)는 물건을 싣지 않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유순한 땅은 그렇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여 유익하고 무강하고 크면서도 두터운 바탕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부드러움의 역설적 이미지는 <노자>에 특히 많이 나옵니다. 노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루는 역설을 두고 마치 곤괘의 육이효처럼 큰[大] 도의 이미지를 제시하지요. 노자에 따르면 도는 크고 서서히 하고 멀고 그러면서도 돌아옵니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크다는 건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도를, 그리고 자연을 법받는 것이고요[天法道 道法自然] . 인간 윤리의 근거를 자연에서 찾는 이유는,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노자는 강하고 곧은 것 보단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을 중요하게 보지요.. 至柔至順한 곤괘의 直은 乾의 원리를 물건(物)으로 펼쳐지는데 한치의 틈과 오차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은데, 끊임없이 자신을 유연하게 변형할 수 있기에 따를 수 있는 곤의 성격을 직(直)으로 풀이한 것이 재미있네요. 노자가 유연함을 중요하게 본 것도 자연을 본받는 이 곤괘의 덕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노자와 함께 하니 주역의 해석이 넓어지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깊이 있는 해석 기대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