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동철’ 팀에서는 중용 12장에서 19장까지를 읽었습니다. 읽어나갈수록 <계사전>의 말들과 공통된 사유의 지반의 지반 위에서 구성되었음을 실감하고 있는데요, 둘을 어떻게 엮어서 서로를 더 풍요롭게 독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논의들이 무성하게 쌓여가고 있는 중입니다^^.
<중용>과 <계사전>을 읽다보면, 확실히 중국 사유는 추상적·이론적 논의보다는 현실적·구체적 체험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말이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 또한 말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일상적 체험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보완해가며 우주 내에서 온전한 가치를 구현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만큼, 윤리라는 것도 실천 과정 속에서 비논리적으로 축적되어가는 정감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도올 샘은 말합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적 불변의 법칙이나 완전한 이데아 같은 것은 ‘논리적 픽션’일 뿐 실제적 윤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따라서 행위의 궁극적 기준이라는 것도 인간 삶의 시공적 조건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변양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時中’이 되겠고요. 많은 분들이 좋아할 만한 대목, ‘부귀에 처해서 부귀한 바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한 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있을 때에는 이적(夷狄)의 법칙에 따라 행하며, 환난에 있을 때에는 환난한 대로 행하니, 군자는 들어가서 스스로 얻지 못할 바가 없다(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 無入而不自得焉.).’ 이처럼 군자는 어떤 삶의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능동적으로 개입해 스스로 얻어내지(自得)하지 못함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중’이고 ‘중용’이 될 것 같습니다. ‘중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엄밀한 정의를 내리기 힘든 것도 이런 면과 관련이 있겠습니다. 우리 조에서는 時中에서의 時를 베르그손적인 ‘지속’과 연관지어 얘기해 보고도 싶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고(ㅋ), 다만 중용에서의 ‘때’라고 하는 것을 시공간을 포괄하는 ‘세(勢)’나 상황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도로 마무리지었습니다.
16장은 그 유명한 ‘귀신(鬼神)’ 장이라고 합니다. <계사전>에서도 음양의 왕래하는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일컬어 신이라고 했는데요(陰陽不測之謂神), 여기서 귀신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어 빠뜨리지 않는(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걸로 제시됩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도올 샘은 ‘귀신’을 천지 자연에 내재하는 역량, 자연의 생명력 그 자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귀신은 천지, 자연 그리고 道 라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이후에 등장할 개념인 ‘誠’과의 연결이 예고돼 있는데, 이는 ‘易’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같은 귀신에 대한 숭배나 제사, 종교적 감정이라고 하는 것에 신인동형적 인격적 존재에 대한 신앙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근원적으로 탈존재화되고(타자 the Other이라는 객체의 소실), 우리 인간은 우주적 생명 전체의 장의 축약태로서 자신 안에 이미 신성을 구유한 우주적 존재가 되는 것일테니까요. 여기서 바로 위대한 ‘正己而不求於人’의 사상이 도출된다고 도올은 말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존재의 책임이나 실존적 상황의 원인을 나라는 존재 이외에서 구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하고上不怨天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하下不尤人’는 강자의 모습으로 이어지겠지요. 가슴 뛰게 하는 이 말들에 혹해, 일단 저희 조에서는 여기에서 이번 학기 조별 발표 준비의 물꼬를 터보기로 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해 보셔도 좋을 듯요!!!(아자~~ㅋㅋ)
다음 시간에는, <중용> 끝까지 읽어오심 됩니다. 분량이 많아 버거울 거 같기도 한데, 일단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해야 다음 스텝으로 나가기가 용이할 것 같습니다. 힘내요, 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