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진태원 선생님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을 끝내고, 이번 주에는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을 읽었습니다!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은 스피노자의 생애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저서 <신학정치론>의 내용을 차근차근 풀어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책을 읽으며 스피노자의 삶과 문제의식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바뤼흐 드 스피노자 형님!)
스피노자의 삶과 <신학정치론>의 탄생
저희 조에서는 먼저 스피노자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스피노자의 인생은 젊은 시절부터 파란만장합니다. 1632년 11월 24일,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력한 상인 가문으로 태어납니다.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 공동체에서 신앙을 교육받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유대 신앙보다 철학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점점 신앙을 의심하고,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서 23세 스피노자에게는 큰 사건이 들이닥칩니다. 자신이 속해있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아주 가혹한 저주를 받으며 추방당한 것입니다. (정확한 추방의 이유는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낮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나갈 때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 저주받을 것이다.”(31) 이렇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받은 스피노자는 그 후 암스테르담을 떠나 레이던 외곽 지역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 ‘레인스뷔르흐’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그는 렌즈를 깎으면서 생계를 이어가며, 본격적으로 철학 연구에 돌입합니다.
스피노자는 ‘레인스뷔르흐’에서 <지성개선론>을 시작으로,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를 작성하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 <윤리학>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윤리학>을 한창 집필하던 중 스피노자는 잠시 그 작업을 밀쳐둡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 “더욱 급박한 문제”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탐구였고, 그 결과물로 <신학정치론>이 탄생합니다. 스피노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네덜란드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였으며,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어떻게 국가체제를 구성해야 하는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다투었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신학자들(칼뱅파)과 레헌트(진보적인 엘리트)들로 나뉘어 국가와 종교, 신학과 정치의 관계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피노자는 신학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자유를 주장합니다. 스피노자는 “이성이 신학의 하녀가 되거나, 거꾸로 신학이 이성의 하녀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54)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미신으로부터 개인의 정신을 해방시키며, 교회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삶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72)으로 <신학정치론>을 집필합니다.
(신학정치론。。。두둥!)
스피노자의 자유와 주역의 자유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이 관통하는 주제는 ‘자유’입니다. 저희 조는 스피노자의 자유와 주역의 자유를 연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초월적인 신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세계 바깥에 존재하여 인간을 향해 명령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선, 인간이 자유를 위해서는 초월적 신에 의지하고, 예언과 기적을 믿는 그러한 미신적 신앙으로부터 해방되는 게 중요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을 말하며 이 세계를 내재적 원리로 설명하는 시도를 합니다. 모든 물질적 운동, 신비한 현상, 인간의 감정과 마음은 자연의 원리(내재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저희는 이를 주역에서 건(乾)과 곤(坤)의 운동으로 이 세계의 운행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역에서도 길흉(吉凶)의 사건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원리에 의해 설명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존재를 내재적으로 설명할 때,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는 “인간은 다른 실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법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영역”에서 살 수 없다는 결론” (42)에 이릅니다. 주역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하늘(天)과 땅(地) 사이에 존재하며, 6효(爻)와의 관계 속에 위치합니다. 스피노자, 주역은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일부이며 항상 외부 영향에 종속”(43)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어찌 보면 아주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처한 바탕 속에서 새롭게 자유를 정의합니다. 스피노자는 “수동에 빠진 삶의 치료법은 덕virtue, 즉 지성과 오성을 추구하는 것”(43)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에서는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능동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적합한 관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더 탐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역에서도 인간의 자유를 탐구하는 개념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낙천지명(樂天知命)의 개념, 길흉에 얽매이지 않는 정일(貞一)한 태도, 종일건건(終日乾乾)한 삶 등등. 앞으로 주역과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를 이렇게, 저렇게 엮으면서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이번 주 후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도 스피노자와 주역을 재밌게 엮어보아요~
거의 모든 철학자가 삶에서 추방을 경험했으나, 추방 당하는 것으로 철학을 시작한 건 아마 스피노자가 유일할 거라는 들뢰즈의 말이 있었죠. 들뢰즈 역시 스피노자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거죠. 그리고 저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같이 빠지고 있고요. ㅋ
주역을 같이 읽으며 스피노자의 사유가 좀 더 풍성하게 다가오는데, '자유'에 대한 개념도 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조건으로서의 겪음을 부정하지는 않고, 우리가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설정하지 않고도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기. 문제의식은 달라도 주역과 스피노자에서 이러한 자유를 공통되게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밖에도 인식, 존재, 개체의 사회성 등 여러 가지 스파크가 튀는 지점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다 꿰기에 공부도 부족하고, 토론 시간도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엮을 게 많아서 좋네요. ㅋㅋ
hilde
2023-03-25 14:57
스피노자와 주역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스피노자는 왜 그토록 지성, 오성을 강조하는 적합한 인식을 자유라고 강조했는지, 그 시대의 배치를 생각지 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겠지요. 그도 역시 데카르트처럼 신체와 이성을 분리하는 형이상학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 위험하지요. 그야말로 상상에 바탕한 부적합한 인식이 되고 맙니다. 중세의 절대적 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부적합한 인식,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저항의식이 스피노자적 자유의 출발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주역은 易(변화)에 대한 인식을 자유이자 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도 자유의 개념을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ㅋㅋㅋ
마지막으로, 낙천지명(樂天知命)의 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易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정랑
2023-03-25 15:32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이란 제목에서 말해주듯 근대의 탄생은 기존의 신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기존의 종교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으로요.
문빈샘 글처럼 어떻게 우리가 놓여진 조건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주역과 스피노자 모두의 공통점인 거 같아요. 논의한 내용들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또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어 보아요^^
거의 모든 철학자가 삶에서 추방을 경험했으나, 추방 당하는 것으로 철학을 시작한 건 아마 스피노자가 유일할 거라는 들뢰즈의 말이 있었죠. 들뢰즈 역시 스피노자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거죠. 그리고 저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같이 빠지고 있고요. ㅋ
주역을 같이 읽으며 스피노자의 사유가 좀 더 풍성하게 다가오는데, '자유'에 대한 개념도 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조건으로서의 겪음을 부정하지는 않고, 우리가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설정하지 않고도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기. 문제의식은 달라도 주역과 스피노자에서 이러한 자유를 공통되게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밖에도 인식, 존재, 개체의 사회성 등 여러 가지 스파크가 튀는 지점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다 꿰기에 공부도 부족하고, 토론 시간도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엮을 게 많아서 좋네요. ㅋㅋ
스피노자와 주역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스피노자는 왜 그토록 지성, 오성을 강조하는 적합한 인식을 자유라고 강조했는지, 그 시대의 배치를 생각지 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겠지요. 그도 역시 데카르트처럼 신체와 이성을 분리하는 형이상학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 위험하지요. 그야말로 상상에 바탕한 부적합한 인식이 되고 맙니다. 중세의 절대적 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부적합한 인식,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저항의식이 스피노자적 자유의 출발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주역은 易(변화)에 대한 인식을 자유이자 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도 자유의 개념을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ㅋㅋㅋ
마지막으로, 낙천지명(樂天知命)의 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易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이란 제목에서 말해주듯 근대의 탄생은 기존의 신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기존의 종교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으로요.
문빈샘 글처럼 어떻게 우리가 놓여진 조건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주역과 스피노자 모두의 공통점인 거 같아요. 논의한 내용들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또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