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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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괘 읽기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역의 門에 들어선 거죠^^ 64괘의 맨 앞에 있는 두 괘, 건곤입니다. 건곤의 막대한 분량은 지난주 쉬어간 덕에 읽을 수 있었다고 다들 이야기했어요. 역병을 이기고 돌아온 우리는 채운샘이 준비해 주신 맛난 만두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토론을 시작하였습니다.
<정옥조>
건곤은 창조(자시, 시작)와 조형(자생, 생장)의 관계이며, 두 괘가 서로 보완하며 동시적으로 펼쳐집니다. 건괘의 시작이 더 근본적이고 곤괘는 건괘의 시작을 바탕으로 하기에 순차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에 위계나 순서는 없는데 왜냐하면 건의 氣도 곤의 형체가 있어야 드러나고 곤의 형체 역시 건의 기가 있어야 생겨나기 때문이죠.
重天乾 - ‘하늘이 건健을 용用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剛함과는 다른 뉘앙스의 健은 하늘이 운행하여 그치지 않고 변화에 응하여 무궁무진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건(健)이란 사람(人)이 우뚝 서서 튼튼하게 세우는(建) 모습으로 강건하다, 굳세다의 뜻이 있는데, 쉼없는 운동성으로 보여 지는 하늘의 작동원리를 인간의 삶에 적용시키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죠. 건괘의 구삼 효사의 終日乾乾은 군자가 天의 성질인 健을 신체에 새기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는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다기보다 우리가 사는 지반이 늘 변화로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변화에 맞추는 것이란 얘기도 했습니다.
重地坤 - 東北喪朋 安貞 吉 음이란 물건은 반드시 그 무리를 떠나 반대되는 무리로 간 뒤에야 편안하여 정하고 길함을 얻는다(194쪽)고 하는데 이는 곤괘의 유순함으로 만물을 기르는 덕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릇 교제하는 것은 순음으로는 안되고 강과 유를 교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르고 따르는 힘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고집하지 않음으로 가능하고, 그 변화의 차이로 무강하고 만물을 다 실을 수 있습니다.
用九와 用六은 드러난 성격(양과 음)의 이면에 어떤 힘이 작동하는 지를 보는 것입니다. 용구는 강건한 양의 힘을 가지고 있음으로 우두머리가 되려하지 말고 무리의 힘을 잊지 말라는 경계의 말로, 용육은 음의 힘을 제대로 쓰려면 항상한 양의 힘을 내재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규창조>
중천건괘(重天乾卦)와 중지곤괘(重地坤卦)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만, 괘에 대한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많이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갖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앞으로의 괘 읽기 또한 험난할 거라는 걸 미리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64괘 중에서도 중천건괘와 중지곤괘가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뾰족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괘들을 어떻게 이해할지, 괘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관한 대략적인 질문이 남았습니다.
64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사건을 64개로 추상화한 것인데, 그 중에서 건괘와 곤괘는 순양과 순음으로서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건이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괘는 일단 상(象)이라는 점에서, 모든 괘는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괘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인간이 겪을 만한 사건을 음과 양의 에너지 비율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괘를 읽는다는 건 그러한 에너지 비율이 어떤 사건으로 드러나는지 해석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데요. 그렇다면 모든 괘가 동등하게 어떤 사건을 유형화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동등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건괘와 곤괘만을 유독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는 원리로서 현실화되지 않는다거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얘기되는 걸까요? 가령,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는 두 가지 원리로서 건과 곤을 말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뿜어내는 지뢰복괘(地雷復卦)와 어떤 상황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으로서의 산지박괘(山地剝卦)도 중요한 원리로 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토론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왜 그런지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봐야 하는 건 중천건괘-중지곤괘로 시작해서 수화기제괘-화수미제괘로 끝나는 주역의 체계라는 걸로 이야기가 대략 정리됐는데요. 주역에서의 건괘와 곤괘의 위상을 이해하려면, 결국 다른 괘들이 주역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괘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괘에 대해서는 중천건괘 구삼효에 대해 주로 얘기했는데요. 안 그래도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는데 “종일건건”하라는 게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서는 우리가 아등바등하며 사는 모습이 과연 우리 자신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 것인가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대로 잘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대체로 우리의 노력은 어떤 정해진 결과에 대한 목적을 위해서만 발휘되죠. 그래서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외부를 탓합니다. 노력이 외부적 요인에 좌지우지되는 건데, 건괘 구삼효가 보여주는 노력은 이와 다릅니다.
구삼효는 양의 자리에 양이 와서 앞서가려는 자기 기질을 제어하기 힘든 데다가, 한 괘에서 다른 괘로 넘어가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변동이 심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점에 주목해서 구삼효를 ‘위태로운 자리’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위태롭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습니다. 구삼효에서 말하는 “종일건건”은 이런 자릿값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발휘해야 할 노력은 외부적 결과를 성취하려는 것으로만 발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삼효에서 얘기하는 노력해야 할 지점은 끊임없이 그러한 결과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의 탐욕을 제어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공자도 문언전에서 구삼효를 해석하며 내가 이르러야 할 곳과 내가 무엇을 마무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라고 얘기했죠. 그리고 구삼효의 자릿값은 그러한 제어의 역량이 어딘가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또한 얘기합니다. 기본적으로 양의 자리에 양효가 와서 오버하기도 쉽지만, 동시에 자신을 제어함으로써 건괘의 덕인 강건함(健)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건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주역이 얘기하는 역량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다면, 왜 우리는 그러한 역량을 펼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왜 우리는 때를 읽지 못할까?’라고 바꿔 읽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게요. 우리에게 내재된 역량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역시 뾰족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올 한 해 64괘 386효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던지게 될 질문인 것 같습니다.
<황리조>
은주샘이 이미 일찌감치 올리셨으니 가셔서 다들 읽어주세요~
*** 6주차 (3/26) 공지 ***
* 읽을 책 : 『주역정의』 3권 <수화기제>괘, <화수미제>괘입니다.
* 과제 : 함께 얘기 나누고 싶은 대목을 골라 어떤 얘기를 나누고 싶은지 간략한 메모형태로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토요일 밤 10시까지 [주역철학]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되도록 다른 선생님들의 글을 읽고 토론에 참여하면 좋겠지요.
* 간식 : 은주샘, 혜원샘께 부탁드립니다.
*** 긴급공지 하나 더 있습니다 ***
이번주(6주차)에는 10주차에 있을 조별 팀 발표에 대한 개요를 발표합니다. 팀별로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계사전 대목을 준비해서 오시면 됩니다. 주역 토론 후 3교시 팀별 토론 시간 전에 발표할 예정이오니 만반의 준비를^^ 하시면 됩니다. 일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