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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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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수화기제(水火旣濟)와 화수미제(火水未濟)를 읽었습니다. <주역>의 끝자락에 있는 이 두 괘는, '모두 이루어짐'과 '아직 덜 이루어짐'이라는 오묘한 이름을 달고 있지요. 기제와 미제, 완성과 미완성.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기제와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미제. 어쩐지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정반대의 상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주역>은 우리에게 미제를 넘어 기제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건 뭘까요?
한강백은 기제와 미제괘의 작음[小], 음유함[柔]에 주목합니다. 기제괘의 괘사 형소(亨小)는 여러 가지 버전의 해석이 있습니다. 정이천은 기제괘의 형소(亨小)를 소형(小亨)으로 풀어야 하며, 모든 효가 제자리에 있는 기제의 때에도 아직 경계할 것이 있어 "조금 형통하다"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죠. 한강백은 기제괘의 괘사를 글자 그대로 풀어 "작은 것도 형통하다"라고 해석합니다. 기제괘의 다음 괘사, 초길종란(初吉終亂)과 관련하여 경계를 말하긴 하지만, "소형"에 대해서는 기제괘의 '모두 이루어짐'이라는 이름에 맞게 풀었죠. 작은 것까지 형통해야 모두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작은 디테일이 완성을 좌우한다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럼 미제는 뭘까요? 옥의 티가 남아 있는 상태일까요? 미제는 왜 기제와 한 쌍일까요?
공영달은 기제괘가 "처음에는 길하고 끝내 어지러[初吉終亂]"운 이유는 멈추기[止]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으면 그대로 머물면 될 것 같은데, 그런 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건 끝이 아니라 언제나 시작을 의미합니다. 완성 상태는 정지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나아가야 합니다. 진덕수업(進德脩業) 해야 하는 것이죠. 아니 근데 이렇게 힘들게 이루었으면 가만히 있으면 되지, 왜 나아가야 하는 걸까요?(가끔 진進이라는 글자를 보면 불쑥 이런 생각이 들곤 하죠^^) 그 이유는 아마도 '완성'이 쓸모없는 것을 제거하고 남은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건 가능하지도 않고요. 기제는 언제나 미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벗어났기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제가 극에 달하면 기제가, 기제가 극에 달하면 미제가 되는 거죠. 이 순환 속에서 완벽한 완성 같은 건 있지도 않고, 있어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기제가 일이 이루어지는 괘라면 미제는 일의 지속을 고민하는 괘입니다. 미제 단전 "불속종야(不續終也)"에 대해 한강백은 "미제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남는 힘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어떤 일이 정점을 찍고 완전하게 되었다 해서, 그걸로 모든 게 끝나진 않죠. 일의 완성 다음에는 그것을 지속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럼 아슬아슬한 균형은 금세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제는 기제가 무너진 상태가 아니라(공영달 표현을 빌리자면 부제不濟가 아니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담보하는 운동성으로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인 것이죠. 덜 이루어짐은 다 이루어짐의 방해나 실패가 아니라 그 보완인 것입니다.
모든 효가 제자리에 있는 기제괘가 형소(亨小)하다면, 모든 효가 제자리를 벗어난 미제괘는 유(柔)가 중(中)을 얻어 진가를 발휘합니다. 미제괘의 주체는 육오효입니다. 정(正)은 아니지만 중(中)을 얻은 음효입니다. 공영달은 미제괘 육오효에 대해 "유(柔)를 지키고, 중(中)을 써서 현철한 자에게 위임"하는 괘라고 풀이합니다. 현철한 자는 강(剛)으로서 중(中)에 있는 구이효를 말합니다. 육오효는 존귀한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를 내세우지 않고 강건한 구이효에게 맡깁니다. 그럼 구이효는 수레를 끄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曳其輪) 환난을 건너가는 거지요. 공영달은 "강과 유가 서로 응하여 서로를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육오와 구이효의 관계를 풀이합니다. 극과 극 사이에는 오히려 그렇기에 서로를 구제하는 힘이 작동하는 것이죠.
기제와 미제 둘 다 작음[小]과 유(柔)가 중요한 게 눈에 띕니다. 이 작음, 음유함은 옥의 티 하나까지 잡아내는 경직된 힘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는 힘의 차이와 그로 인한 순환을 강조합니다. 노자는 "큰 이룸은 결함이 있는 것 같고, 그렇기에 그 쓰임에 다함이 없다[大成若缺 其用不弊]" (45장) 라고 했습니다. 노자의 이 말은 단순히 역설을 강조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성, 완벽이라는 개념은 허상이고, 있는 건 극과 극처럼 보이는 다른 것들의 상호작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지속성, 운동성을, 노자는 성(成)이 아니라 용(用)이라는 말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고요. 강건해 보이는 완성의 단계는 결국 결함으로 보이는 작은 것들의 운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거지요.
이번에 기제와 미제를 읽으며 떠올린 건 이족보행 로봇과 인체의 차이였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작은 발로 이 무겁고 길다란 몸뚱이를 지탱하고 균형 잡고 설 수 있는 이유는 근육세포들이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인간 모양으로 로봇을 만들려면 발이 무지하게 커야 하고 무게도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도 간신히 서 있는 정도고요. 완성, '이루어짐은 담보하는 건 완벽한 설계, 흠잡을 데 없는 준비가 아니라 그것의 실제 작동, 외부와의 상호작용인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혼자서 뭔가를 완벽하게 이룬다는, 그런 상을 짓는 건 오히려 나아가지 못하는[止] 답보상태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기제가 처음에는 길하고 끝내 어지러운[初吉終亂] 이유가 멈추기[止] 때문이라는 건 이루어진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죠.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따르기 위해 미제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남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구요. 기제와 미제의 관계성이 변화의 국면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자는 이것을 大成若缺이라는 말로 한 번에 설명하고 있는 것 같네요. 노자와 함께 보니 주역의 진면목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점점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