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以知來, 知以藏往.
신(神)으로써 장래를 알고 지(知)로써 지나간 일을 간직한다. (계사상전 10장)
계사상전 1~5장이 주역의 원리편이라면 6~12장은 활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주역의 여러 괘들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어떻게 주역을 활용하여 천지 사이의 일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 예시를 보여줍니다. 이번에 읽은 범위 중 풀어보고 싶은 구절 "신(神)으로써 장래를 알고 지(知)로써 지나간 일을 간직한다"라는 계사상전 10장의 구절입니다.
8장부터 수(數)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게 풀어내던 계사전은 10장에서 주역을 읽는 의미, 성인이 주역을 활용하는 방식을 종합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주역을 활용하는 방식은 미래를 알아서 그걸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게 아닙니다. 신(神)은 서양의 그것처럼 전지전능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오한 우주의 질서라는 의미에 가깝죠. 공영달에 따르면 "오는 것에 일정한 방소가 없는 것"입니다. 방소는 인간이 기준을 잡고 방위를 파악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神)의 차원, 우주적 차원에서는 방위가 따로 없지요. 따라서 이 신으로써 장래를 안다는 건, 인간으로서 파악하기 어려운 우주의 질서 속에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10장을 더 읽어보면 신(神)은 끝없이 둥글게 회전하는 것과 세트입니다[圓而神]. 원(圓)은 도상학적으로 순환, 무한, 완전을 뜻하는 도형입니다. "둥글어 신묘하다[圓而神]"는 시초의 덕[蓍之德]이죠. 점을 친다는 건 우선 우주적 질서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그럼, 점은 왜 치는 걸까? 로또 번호 미리 알아서 인생역전 할 게 아니라면? 대체? 왜? 인생사 새옹지마 알 수 없는 우주의 법칙, 이런 알기 싫어도 알아야 하는 인생의 쓴맛을 알려고? 좀 막막한 마음이 듭니다. 점을 쳐서 뭔가를 미리 아는 건, 결국 고급정보를 확보해서 앞서나가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있는 것이죠. 하지만 계사전은 안다[知]는 건 지나간 것을 간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藏)은 창고에 이것저것 쌓아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든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말이죠. 우리 몸의 오장(五臟)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장은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언제든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미 나를 이루는 일부로써 움직이고 있고요. 이런 이미지의 장(藏)을 지(知)와 연관시킨 것은, 앎이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축적하는 게 아님을 말해줍니다. 앎이 내 일부가 되는, 체득의 의미가(더 나아가 수양의 의미가) 있는 거죠. 공영달은 "지(知)로써 지나간 것을 간직함은 감에 떳떳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떳떳하려면 의심이나 모자람 없이 편안해야 하죠. 주역에서 지(知)는 괘(卦)의 차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괘의 덕은 네모져서 안다[卦之德, 方而知]"고 하지요. 일정한 방소가 없고 둥글고 신묘한 시초와 달리, 괘는 딱 떨어지고 질서잡히고 대립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분수가 있는"(한강백) 모양입니다. 점을 쳐서 안다는 건, 정보를 미리 획득하는 게 아닌, 끝없는 우주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를 구축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상^^!
사실 점을 치고 미래를 미리 알고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려는 것은 유리한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입니다. 계사전에서는 이원이니 방이니 하는 점잖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 비극을 보면 남들보다 앞서가려다 거꾸러진 이야기들로 화끈하게 경고하고 있지요(프로메테우스부터 오이디푸스까지~). 계사전이 신(神)과 지(知)를 통해 점을 치고 세상을 해석하는 인간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보여줬다면, 그것을 <중용>과 <도덕경>은 좀 다른 갈래로 받아들입니다.
우선 <도덕경>은 앞날을 아는 것의 헛됨을 강조합니다. <도덕경> 38장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前識者 道之華而 愚之始
남보다 앞선 지식은 도의 헛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도덕경> 38장 中)
미리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도(道)이기에, 미리 아는 건 말단이라는 것이죠. 왕필에 따르면 미리 안다는 것은 "실정을 파악했다 하더라도 간교함이 더욱 치밀해지고, 그 명예로움이 커져도 독실함을 더욱 잃게된다"고 풀이했습니다. 앎이 마치 나의 오장육부처럼 나를 편안하게 하고 살리는 게 아니라 점점 쪼들리게 만드는 모습을 노자는 '헛된 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중용>은 미리 아는 것[前知]를 일단 긍정하긴 합니다. 미리 아는 사람은 말과 행동과 도(道)에 있어서 어렵거나 궁하지 않게 된다고요. 이런 점에서 <중용>은 확실히 <도덕경>과 달리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극한 성[至誠]을 체득한 자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 禍福將至 善必先知之 不善必先知之 故至誠如神
지성의 도는 앞일을 미리 알 수 있다. (...) 복과 화가 장차 이르려 할 때 좋은 일을 반드시 먼저 알게 되고, 좋지 못한 일도 반드시 먼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신과 같이 신묘하다. (<중용> 24장 中)
<중용>에서 지성(至誠)은 천하의 성(性)을 다할 수 있는 사람(중용 22장)입니다. 즉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따르고 펼칠 수 있는 사람이지요. <노자>의 도(道)와 통하고, <주역>의 신(神)과 통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어요. 결국 앞일을 안다는 것은 선과 불선을 가려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게 아니라(마치...회귀물 주인공처럼?), 그것들이 나에게 닥치게 되는 일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묘한 원(圓)의 차원에서 편안할 수 있는 자신을 닦는 방(方)의 수단을 얻는 것.
주역에서 이해하는 시공간은 확실히 일반적인 우리의 사고를 넘어서는 것 같죠? 원이신 방이지 [圓而神, 方而知]가 그걸 잘 보여주죠.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음을 신(神)과 지(知)에 대입하여 말하고 있어요. 지나간 것을 지(知)라고 하는데 知가 함의 하는 것을 보면 재밌을 것 같네요.
노자와 중용을 붙여서 보는 주역이라 더욱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