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합니다. 후기를 작성해야 하는데 쓸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분명 두 시간 동안 토론을 했는데, 기억나는 내용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왜 없는 걸까요? 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학인들은 열심히 과제를 해왔습니다. 스피노자와 주역을 엮어서 글도 써오고 질문까지 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피노자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주역과 연결해서 토론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는 먼저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스피노자의 인식론 관련 내용부터 토론하기 시작했지요. 스피노자는 인식을 1종 인식, 2종 인식, 3종 인식으로 구분합니다. 1종 인식은 우연적으로 참된 인식이며, 진리의 외부적 특징을 갖추고 있지만 내부적 특징은 결여하고 있어 부적합한 관념입니다. 반면 2종과 3종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된 인식이며, 진리의 외부적 특징과 내부적 특징도 갖추고 있어 적합한 관념입니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을 브레그손의 원뿔 도식에 대입해서 이해를 시도해봤습니다. 1종 인식은 원뿔의 S 꼭짓점 주변에서 즉흥적이고 습관적으로 기억을 형성하는 일로서 ‘인간’, ‘동물’ 같은 독특한 실재들의 차이를 지각하지 못하고 하나의 용어로 뭉뚱그려서 혼란스럽게 표현하는 관념입니다. 반면 3종 인식은 원뿔의 밑변인 AB의 고차원적인 영역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식을 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내부적 특징(왜 어떤 인식이 참된 답인지, 그 타당한 이유 내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관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밑변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너무 근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현실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독특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뿔의 S 점과 AB 사이에서 병진운동과 회전운동을 하면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동서양의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은 표상이 아니라 정신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관념은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실재로 다른 관념들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어찌 되었든 2종과 3종 인식은 우리의 습관적인 사유 방식을 해체하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생각을 단정 짓기 전에 우리가 S 꼭짓점 주변과 그리고 1종 인식의 반응적 힘을 표현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추 태도를 먼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을 브레그손의 원뿔 도식에 대입해서 정리하고자 했는데, 억지로 끼워 넣은 꼴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겠습니까. 제가 1종 인식과 S 꼭짓점 주변에서 ‘무작위적 경험’과 ‘즉흥인’의 태도로 사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은 더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2종과 3종 인식 모두 어떤 인식이 참, 거짓인지 구분하게 해주는 적합한 인식이라고 했는데요. 그럼,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2종 인식은 밑변 AB 영역에 이르는 주의 깊은 식별을 하지 못하고 원뿔의 수축, 확대 운동이 그 중간 영역까지밖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3종 인식이 2종 인식보다는 자연 전체의 질서를 더 고차원적으로 이해하는 직관적 지식입니다.
다음은 신체(연장 속성의 양태)와 정신(사유 속성의 양태)의 평행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은 존재론적으로 자립적이고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평행선 관계를 유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과 신체가 서로 전혀 다른 것임에도 양자는 하나의 연합체로 통일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정신-신체 이원론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정신과 신체의 관계 역시 이원론처럼 보이기 십상입니다. 양자는 독립적이고 서로 접촉도 안 하고 간섭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이 이원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스피노자의 정신과 신체의 관계는 데카르트의 이원론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문제는 자기원인으로서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연합체로 통일될 수 있느냐 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원들은 이런저런 궁리를 했으나, ‘알 수 없음’으로 토론을 끝맺고 말았습니다. 이 질문을 계속 화두로 삼고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궁금증을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함께 코나투스, 즉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양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욕망은 정신과 신체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삼각형이 독립적인 세 변의 만남으로 구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개념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아쉽게도 주역과 연결지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음 토론에서는 스피노자와 주역의 신묘한 마주침에 대해서...
왜 자꾸 브레그손이 등장하나요! ㅋㅋㅋ 아무리 봐도 베르그손이 돼야 할 것 같은데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브레그손 빼고는 혼란스러움이 잘 반영된 후기인 것 같습니다.
평행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강의를 한 번 들어야 할 것 같고, 적합한 관념의 형성은 확실히 베르그손과 함께 이야기할 부분이 있는 듯합니다.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만 반응하는 게 부적합한 관념이라면, 하나의 자극에 대해 비결정지대를 넓히는 것이 적합한 관념,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하나씩 정리해보죠.ㅋ
브레그손의 원뿔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후기였습니다. 병진운동과 회전운동 사이에서 형성되는 적합한 관념이라는 게 뭔지, 사유의 운동성은 어떻게 펼쳐지는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ㅋㅋㅋㅋ
어려운 토론을 하셨네요. 평행론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연합체로 통일'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이원론이 되어 버리죠, 양태를 표현하는 다른 측면 같은데요. 정신으로 신체로 ...
후기 쓰기 난감하다고 하시곤 이런 멋진 후기를 써주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