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주역 2주차 토론 정리 및 3주차 공지>
* 이번 주부터 오전 주역 토론의 공지는 지난 시간의 후기와 함께 올라갑니다.
2주차 수업은 우수(雨水)에 그 절기명에 딱 맞게 아침부터 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봄기운으로 우리의 생각도 차츰 싹을 틔워보려는 에너지가 작동해서 1주차 보다 다소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입니다. 오전의 채운샘 강의와 주역 세미나 일정을 소화하려다 보니 지난 주에는 주역 세미나 시간이 부족했는데, 채운샘이 강의 시간의 중정을 지켜 주셔서 오전 토론 시간이 좀 확보가 되었습니다.
오전과 오후, 팀원도, 텍스트도 다르며, 각기 과제가 있어 좀 버거운 감이 있습니다. 여러 샘들이 빡세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몸이 좀 적응을 하면 나아질까요? 올해 새로 오신 샘들은 더 어렵고 힘드실 거 같아요. 하다 보면 어떻게 길이 만들어지겠죠? 일단 오전 주역 계사 상전의 6~12장 토론을 조별로 간략하게 스케치합니다.
<황리조>
샘들이 써오신 쪽글에 주역의 인용 구절이 많이 겹쳤습니다. 지난 주에는 1~5장의 내용을 좀 이해해 보겠다고 했다면(시도만 하고 말았지요), 이번 주는 샘들이 써온 쪽글에서 계사전의 맛을 보는 것으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우선 言行, 君子之樞機(말과 행실이 군자의 추기)로 시작했는데요. 이 말은 상전 6장, 풍택중부의 효사 鳴鶴在陰, 其子和之(우는 학이 음지에 있는데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에서 군자의 말과 행동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영향을 미침을 말하는 것으로 인용한 공자님의 글입니다. 이를 우리 삶으로 가져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외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인간의 신체가 변형되면서 몸 밖으로 내보는 것이죠. 그 말과 행동은 어떻게든 천지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 말이 천지에 얼마나 감하느냐에 따라 배치(관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관계속에서 추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나와 관계하고 있는 주변 뿐 아니라 천지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참으로 개인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 역량은 곧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니 일상에서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며 살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더불어 천지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한껏 고양시켜주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성인의 말과 행동이 시공간적으로 멀리까지 울림을 일으키는 것은 9장에서 말하는 역의 이치 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생각이 없으며 함이 없어 고요함)으니 感而遂通天下之故(천하의 일과 통할 수 있고), 이는 至神 신묘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구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无思, 无爲 생각이 없고 함이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또, 역은 변화를 말하는 데 움직이는 세계가 어떻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요? 하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무사와 무위는 사심으로, 욕심으로, 내 기대를 투영하지 않고 행위하는 것이라면 일상에서 무엇을 말하는 건가? 당장 주역 공부를 하는 것도 무언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내 삶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진대 말입니다. 토론을 하면서 무사와 무위란 나의 좁은 지평에서 바라보는 눈에 보이는 이익이나, 당장 나에게 좋고 나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환의식과 연관시켜 해석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思와 爲가 개별 인간의 감각적 차원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였지요, 그리하면 역의 세계, 곧 천체의 쉼없는 운동을 멀리서 보면 고요해보이듯, 천지와 감하고 통하는 사람은 세상의 번잡한 일들에 대해서 요동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역에서 말하는 낮과 밤이 계속 반복됨이 우리 삶에서도 힘든 일이 지나면 곧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건 실상 그 말 자체가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일상에서 딱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겪는 마음의 갈등, 흉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크게 출렁이기 않고 겪어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으로 역에서 말하는 開物成務(開物이란 물리세계의 근본이며 成務란 인생의 근본법칙)을 이해하려는 부단한 공부가 선행해야 한다고 했지요.
부가하면, 무를 얘기하면서 시초점을 칠 때 작대기 50개 중 내려놓는 하나가 곧 태극이면서, 無인데 이 하나를 내려 놓아야 시초점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무와 유가 서로를 의거해서 성립된다는 것을 시초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시초(가운데가 텅비어 둥근 모양의 풀)가 점을 쳐서 만들어 내는 괘 모양에서 圓而神, 方以知를 말하고 있다는 증의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아주 디테일하게 점의 도구에서부터 과정까지 모두 역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정옥조>
이번주는 주역계사 상전 6~12장을 읽고서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한테는 빠르게 느껴지는 진도가 버겁기는 하지만,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주고받은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12장에 나오는 ‘형이상자 지위도 형이하자 지위기 ‘를 보며 형이상과 형이하는 이원적 관계가 아닌 둘 모두 形내의 사건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을 통해서 내부와 외부가 소통하는 모습이며 마치 주역의 象 또는 추기의 모습 같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이원론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주역에서 만난 형이상과 형이하는 일음일양의 원리인 도의 움직임처럼 늘 형을 만들고 이미 그 안에 도의 원리가 내재해 있는 모습이 한 몸체 같아 보입니다.
6장에 나오는 내용 중 ‘성인이 변화를 보고 상을 세우고 길흉을 결단한다’에서 변(變)이 잠재적인 차원이라면 단(斷)은 그 잠재성의 현실화인 걸까?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길흉을 곧 득실로 연결해서만 생각했는데, 이 질문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단하는 순간 (결정하는 순간) 위(位)가 정해지고 그것은 현실이 되고 거기에서 길흉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잠재태로 있는 수많은 기억중에 어떤 부분을 단해서 현실로 갖고 올 것인지? 그리고 그 때 시(時) 와 중(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규창조>
계사전 매번 읽으면 읽을수록 존재론, 인식론을 망라하는 철학서일 뿐 아니라 인류 문명사, 정치, 종교, 윤리적 실천 심지어 점치는 방법까지 등등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만큼 읽는 자의 해석 역량에 따라 길어 올려 엮어낼 것이 무궁무진한 보물상자이란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책을 단 4주 만에 완성하는 ‘속성’ 세미나인지라 참 거시기 합니다. 계사전을 몇 번 읽어도 도통 뭔 말인지 모르는 것 천지인데 이번에 새로 오신 샘들 읽으시기 어떠실까 (저의 경험으로) 내심 걱정했는데.. 어휴 저의 기우였습니다. 다들 성실히 읽어오시고 또 생각할 거리, 이야기들 가지고 오셔서 재미있게 세미나 하고 있습니다. 오티 때 채운샘 말씀처럼 욕심내지 말고 매 시간 마음에 새길 한 구절만이라도 충분히 다지며 손에 손잡고 가 보아요!
-“변화를 아는 자는 신이 하는 바를 알 것이다.”(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역은 생각함이 없으며 함이 없어서 적연하여 동하지 않다가 감동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니, 천하의 지극히 신묘한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우리 조에서는 우주가 운동하며 만물을 살게 하는 방식인 ‘자연히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현실의 삶에서 이런 ‘자연히 함’을 우리가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공영달은 위 구절의 소(疏)를 다시길 ‘변화의 도는 작위하지 않고 자연히 된다(變化之道 不爲而自然)’(117)거나 ‘운에 맡겨 자연히 하여 마음과 생각을 관여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任運自然 不關心慮 是无思也)’(123)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나 역의 ‘작위하지 않고 자연히 된다’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보면 직장에서 매번 의견 차이를 보이고, 그래서 기분이 상하게 되는 동료와 더 이상 대립하기 싫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무시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하지만 문제는 천지 우주의 ‘자연스러움’과 달리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편하게 마음먹고 다르게 생각하려 해도 여전히 사람이 원망스럽고, 소통되지 않은 답답함이 여전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경험 다들 하셨을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주역의 지혜를 빌려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토론을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말로는 동료와는 갈등이나 불편함이 없이 잘 지내고 싶어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 깊숙이에는 사실 현재의 갈등이나 불편은 겪지 않아야 할 좋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충분히 갈등이나 불편한 마음을 충분히 지나가려는 마음보다는 어서 빨리 내 마음이 평안하길 조바심내는 데만 온통 마음을 씁니다. 그래서 즉, 우리는 매 순간을 충분히 의연히 겪지(배우지) 못하고 보통 상대를 탓하거나 자신을 비관하는 것으로 끝나서 같은 상황이 오면 또 어쩔 줄 몰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의 기운이 다함으로써 비로소 양의 기운이 드러난다는 일음일양의 역의 원리를 가만히 보면 천지자연은 늘 이런 식으로 모든 일에 별 생각 없이 군말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겪어냅니다. 마치 따뜻한 봄은 혼자 불쑥 오는 것이 아니라 매서운 겨울을 온전히 겪음으로 인하여 오듯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란 겪을 것을 겪고 싶지 않고 내가 느끼기에 좋은 것만 선택적으로 겪고 싶은 사심 가득한 생각, 바램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마음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주가 변화의 자연스러움을 산다고 한다면 우주는 어떤 상황은 좋고 나쁘다고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음의 상황이 오면 음인대로 양이면 양의 때를 살아갈 뿐이지, 음이면 얼른 양이 되기를 혹은 양이면 음으로 가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좀 힘들고 답답한 상황이면 견딜 수 없어서 얼른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거나 혹은 조금만 좋다는 생각이 들면 요기만 있고 싶어서 안달을 냅니다. 하지만 음양의 변화를 구현하며 사는 우리들도 우리가 보기에 길거나 짧아 보여도 여튼 어김없이 시간은 가고 상황은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역에서는 우리의 이런 경거망동하기 쉬움을 간파하시고는 변화하는 운동성만 있을 뿐임을 마음에 새기며 늘 우리의 말과 행동을 겸손히 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의 이런 ‘자연스러움’을 본받는다는 것은 마주한 상황이 힘들다고 찡찡대고, 좋다고 금세 헤헤거리지 말고 ‘근신(謹愼)’하며, 의연하게 처신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흠.. 말은 그런데 또 상황이 닥치면 생각이 안 나고 자꾸 하던 대로 마음이 행동이 불쑥 나가게 되는데요. 자꾸 곱씹고 새겨 마음에 붙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 3주차 (2/26) 공지입니다 ***
* 읽을 책 : 『주역정의』 「계사하전」 1장~4장입니다.
* 과제 :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읽으시면서 함께 얘기 나누고 싶은 대목을 골라 어떤 얘기를 나누고 싶은지 간략한 메모형태로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토요일 밤 10시까지 [주역철학]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되도록 다른 선생님들의 글을 읽고 토론에 참여하면 좋겠지요.
* 간식 : 최수미샘, 임영주샘께 부탁드립니다.
그랬네요, 우수에 비가 왔었지요? 후기를 모아 놓고 보니 조별로 참 다른 이야기를 했네요. 질문과 생각의 교차 속에 급변하는 것이 토론이니 그렇겠죠.
새로 시작하는 샘들께서 힘드실 거 같은데, 이제 2주하셨는데요. 마디마디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 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