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1장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천(天)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교(敎)라 한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戒愼)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공구(恐懼)한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고 일컫는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天)과 지(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된다.
이번 시간부터 동철팀은 <중용, 인간의 맛>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중용>이네요! 이번 시간에는 <중용>의 정수가 담겼다고 할 수 있는 1장을 읽었습니다. 천명(天命), 성(性), 도(道)...어려운 말들이 처음부터 쏟아집니다. 어질어질^^! 동철팀은 <중용, 인간의 맛>의 독특한 해석을 길잡이 삼아 조금씩 나아가 보려 합니다.
유명한 <중용>의 첫 구절은 <중용>에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주제문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 구절은, 인간의 본성[性]과 인간이 이룬 문명[敎]이 자연의 질서[天]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짧은 구절 안에 압축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이런 점은 이번에 읽은 [계사전]의 인류문명창건(?) 부분과도 겹칩니다. [계사하전] 2장은 성인이 기물을 만들어 문명을 세우는 것의 기원을 자연의 이치를 본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주자는 <중용> 1장의 성(性)을 이치[理], 교(敎)를 문명으로 해석하고 있고요.
그러나 우리가 본 도올의 해석은 천명(天命)과 성(性)을 도덕적 진리나 최고선으로 해석하지 않고 "평범한 희노애비의 감정의 기(氣)"로 접근합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희노애락을 느끼고 발휘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감정을 이성과 대립시키고, 감정을 이성으로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중용>에는 희노애락과 대립되는 말이 나오진 않습니다. "희노애락이 발휘되지 않는 것은 중(中)이고, 발휘되어 절도에 맞는 것이 화(和)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할 뿐이죠. 중용의 중(中)은 희노애락이라는 심층적 에너지가 동적평형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이고, 그것이 관계속에서 조화되는 것이 바로 화(和)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사태를 감지하고 결단하는 심미적 감수성" 바로 인(仁)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명(天命)으로서의 성(性)은 하늘이 내려준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라, 때에 따라 결단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용, 인간의 맛>에서는 이 과정을 '교섭'이라는 말로 풀이했습니다. 인간이 따라야 할 도는 인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감정을 잘 발휘할까 고민한 결과가 중화(中和)인 것이죠.
중화를 이루기 위해 군자가 해야 할 일은 홀로 있을 때 삼가기, 신독(愼獨)입니다. 도올은 "자기 주체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해 가는 과정"이라고 풀이했는데요, 가뜩이나 혼자 있는 사람 떠올리기 쉬운 개념에 이런 해석을 보고 나니, 신독이 다소 자폐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동철팀에서는 신독을 계사하전 3장의 "정의입신 이치용야(精義入神 以致用也)"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물의 이치의 은미함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의 용(用)은 같이갈 수밖에 없고, 이는 신독(愼獨)이 만물이 길러지는[萬物育焉]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남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물과 동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중용>은 도(道)라고 합니다. 그리고 도(道)는 과정적인 것으로서,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敎)란 어떤 차원일까요? 성(性)에 가깝게 습관을 형성하는 것일까요? 길을 닦는다는 건 뭘까요? 요런 질문들이 교육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가운데 첫 번째 <중용> 토론을 마쳤는데요, 앞으로 더 방대한 이야기를 펼쳐갈 <중용>(과 더욱 독특하게 펼쳐질 해석)을 읽어가 보겠습니다.
*다음 시간 동철팀은 <중용, 인간의 맛> 2장~11장 읽고 정리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