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와 정서모방 - 정서 형성의 간이함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7강과 8강에 대해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주 공부한 주제는 정서에 관한 내용으로 활발발한 토론 시간이었습니다.(늘 그러합니다만) 인간의 본질로서의 코나투스(욕망)와 정서모방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코나투스는 개체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며 개체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생명력이자 기(氣)또는 에너지로 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다수의 물질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이 물질들, 개체들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용되고 변용시키며 존재합니다. 인간의 신체도 하나의 개체죠. 인간의 현행적 본질이 코나투스인데 인간에게는 욕망이자 충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욕망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합니다. 좋아한다는 의식 보다 욕망이 먼저라는 것이죠. 욕망하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 의식 이전에 욕망이 먼저 있다는 것이며 코나투스(욕망)은 자기라고 하는, ‘나’이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 이전에 충동,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힘들이 먼저 있다고 하죠.
나의 욕망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신이 부여한 것이거나 고유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요? 스피노자는 인간의 욕망(정서)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정서모방에 의해서입니다. 정서모방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정서를 모방하는 것으로, 정서가 관계 속에서 상호 전염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습득되는 것입니다. 정서모방의 대표적인 것이 암비치오인데 이는 공명심과 유사한 것으로 잘 보이려는 욕망이기도 하고, 사람 좋음으로 불리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고 인정욕망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 암비치오가 “인간의 본능도 아니고 유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 계산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문장을 두고 여러 애기들을 나누었습니다만 명쾌하게 정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채운샘의 힘을 빌어 암비치오를 이해했습니다. 암비치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감정이 자신만의 것이라거나 내밀한 무엇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능도, 유전적인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이리저리 계산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정서모방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내가 따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르다고 하면 나도 틀리다고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대로 살려고 애쓰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체의 형성에, 사람들과의 관계에 정서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선거에서 후보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념이나 올바름의 문제보다 감정에 의해(왠지 이미지가 좋아서라거나 나와 친밀한 사람이 지지하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싫어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후보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또 끌림이나 싫음으로 표출되는 공감이나 반감은 경우는 어떨까요? 그 대상 내에 뭔가 고유한 것 (“실재들의 은밀한 성질”)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이것 또한 그 대상이 우리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실재들과 유사하다는 생각(상상)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정서들은 은밀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은 아주 명석하고 판명합니다.
주역에서 ‘역은 간이(簡易)하다’는 게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이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뭐 다른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고유의 본질적이거나 내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감정에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스피노자는 감정이 내 것도 상대의 것도 아니라고 하죠. 정서는 언제나 외부(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것이 정서모방이란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기를 바라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상대방도 사랑하기를 바라고, 내가 미워하는 것을 상대도 미워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기질과 욕망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데 이는 지배욕으로 표출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갈등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왜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기를 바랄까요? 인간은 정서 작용을 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며 다음 주 공부로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 다음주 읽을 과제는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9강과 10강입니다.
스피노자 이야기로 활발발 ㅋㅋㅋ 그렇죠. 저희가 좀 많이 얘기하긴 해요? 덕분에 문턱이 높은 그 스피노자의 철학을 속성으로 맛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풀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죠. 일차정서로 왜 기쁨과 슬픔뿐만 아니라 욕망이 꼽히는가부,코나투스(욕망)와 정서모방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중요한 질문들이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았고, 거기다 주역과 같이 붙여서 얘기하려다 보니 갈 길이 참 머네요. ㅋㅋ 그래도 주역과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만한 지점들은 하나씩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공지에서 쓰신 것처럼, 스피노자가 모든 정서를 기하학적 분석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겪는 모든 길흉을 자연의 관점으로부터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문빈의 메모에서 나왔듯, 적합한 인식을 貞, 자연에 근거한 인간의 윤리와 붙여서 얘기하면 어떨까 싶네요. 연결할 단서가 하나둘 모이는데, 근데 이걸 나중에 어떻게 정리해볼까요... 재밌으면서도 뭔가 고민이 됩니다.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