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 精義入神, 以致用也, 利用安身, 以崇德也.
자벌레가 몸을 굽힘은 펴짐을 구하기 위해서요, 용과 뱀이 칩거함은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요, 신묘한 의(義)가 신화(神化)에 들어감은 쓰임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요, 씀을 이롭게 하기 위해 몸을 편안히 함은 덕을 높이는 것이다. (계사하전 3장)
씀을 이롭게 하는 도는 모두 자기 몸을 편안히 한 뒤에 동하는 것이다. (...) 만약 사려(思慮)를 사용하여 동(動)의 쓰임을 구하고, 몸을 편안히 함을 잊어서 공(攻)의 아름다움을 구하면, 거짓이 더욱 많아져서 이치를 더욱 잃게 되고, 이름이 더욱 아름다우나 얽매임[累]이 더욱 드러나게 된다. (한강백, 계사하전 3장 주)
이번 시간부터는 계사하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계사하전은 주역 응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주역을 단장취의 해서 말을 달 수 있는지, 그 사례를 보여주고 있지요. 구체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토론도 더 활발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읽은 것 중 눈에 들어온 말은 이용안신(利用安身)입니다.씀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몸을 편안히 한다는 구절인데요,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계사하전은 성인이 자연을 본받아 문명의 기물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인이 어떻게 주역의 상을 이용[用]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성인은 자연을 본받아 사냥, 농사, 정치, 장례, 재판 등등에 필요한 기물과 제도를 만듭니다. 그물을 짓거나 쟁기를 만들거나 절구를 만들죠. 도구를 만들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역의 성인은 문화영웅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계사전은 이 영웅들을 칭송하기에 앞서, 그 기물은 어디까지나 자연이라는 하나[一]의 이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게 뭔 소리냐면, 성인이 백 가지 기물을 만들 수 있었던 건, 그가 유달리 똑똑한 발명왕이어서가 아니라, 한결같은 자연의 이치에 통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기발한 발명품들은 이미 자연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이용안신"은 이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공영달은 "안신"에 대해 기물의 이로움을 누리기 이전에 "몸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고 "굳이 그 사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물의 결과를 접하고, 거기서 소급해 들어가 원인을 따지는 데 익숙합니다. 인류의 문명사를 돌아볼 때 특히 그러죠. 가령 인간이 수렵채집을 하면서 힘들게 살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더 윤택한 삶을 살게 되었고, 지금은 더 편리한 문명을 누리고 있다고요. 하지만 인류 전체가 그런 단계를 밟은 것도 아닐뿐더러, 농사를 짓게 되어 더 많이 일하고 굶주리게 되었으며, 기계문명의 발달이 꼭 인간의 노동시간을 감소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더 최신의 기술이 우리를 더 편리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는 이유는, 단지 지금 상황이 더 익숙할 뿐이기 때문이겠죠.
계사전은 그런 우리에게 먼저 몸을 편안히 하라고 말합니다. "안신(安身)"의 편안함[安]이란 덜 움직여도 많은 일이 처리되는 식의 '가성비식 편리함'은 아닐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편리함/불편함을 나누고 휘둘리는 경계를 문제삼고 통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계사전은 그걸 덕(德)이라고 표현했죠.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은 역량[德]을 높이는[崇]것이지, 단지 두 번 움직일 거 한 번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기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닌 것이죠.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 자벌레가 몸을 펴는 것은 몸을 굽히는 것과 같이 가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 이면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양면성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면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일의 결과에 대해 거리를 두고 좀 더 편안하게 볼 수 있겠죠. 그렇게 되면 굳이 쓰임이 많은 기구를 구하고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이로써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사물의 양면성을 강조했던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계사하전 3장과 비슷하게 우리의 척도란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강조합니다. 이 상대성에 통달한 성인은 함 없는 일을 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고,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