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계사하전 1~4장을 읽고 토론했는데요. 전반적인 주제, 길흉이나 彖, 象이 성립하는 이야기는 반복됐고요. 성인이 문명을 건설하는 스토리, 마치 주역은 이렇게 읽는 거라고 보여주는 듯한 공자의 단장취의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 만했죠. 일단 각자 읽은 만큼 정리하고, 나중에 또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보죠. ㅋ
<정옥조>
계사하전 1장에 ‘길흉은 정(貞)하여 이기는 것이고, 천지의 도는 정(貞)하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정(貞)에 대한 의견들이 있었다. 貞을 한강백은 바름(正)과 한결같음(一)이면서 또한 순일함, 세상의 기준점으로도 보았다. 또한 貞의 한결같음(一)은 다양한 방식의 만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一)’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님과(一以貫之) 데이비드 봄을 통해서도 일(一)의 전일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 데이비드 봄-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때의 폐단은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 하고 합칠 수 없는 것을 합치려고 하는 것이다.
계사하전 3장에서는 자벌레의 굽힘과 펴짐, 뱀의 칩거함을 통해 안신(安身)과 정의(情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자벌레와 뱀의 굽힘과 펼침, 즉 순환의 양면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신묘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신묘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정의(精義)는 ‘사물의 이치를 정미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물의 이치’란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나의 몸을 편안히 하는 안신(安身)은 주변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서 안신은 고요함인데 고요함은 최고의 動으로써 적연부동 감이수통, 즉 가장 고요하고 정적인 상태일 때 자신의 한계를 넘어 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규창조>
항상 많은 얘기를 슬쩍 건드리고 마는 수준이라서 정리하는 게 난감하군요. ^^;;
크게는 ‘기미를 읽는다’로 얘기를 나눴는데요. 공자가 단장취의한 구절들 중에서 화풍정괘(火風鼎卦) 구사효에 대한 해석을 두고 얘기가 시작됐습니다.
子曰 知幾其神乎 君子上交不諂 下交不瀆 其知幾乎 幾者 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공자가 말씀하셨다. 기미를 아는 것은 神일 것이다. 군자는 위로 사귐에 아첨하지 않으며, 아래로 사귐에 번독(함부로) 하지 않으니, 기미를 안 자일 것이다. 기미(幾)는 동함이 은미한 것이니, 길함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공자의 해석으로부터 ‘기미를 읽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구절들과 연관 지어서 중구난방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ㅋㅋ
일단 ‘기미를 읽는다’는 것이 미래 예측과 같은 것일까?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흔히 기미를 아직 어떤 사건이 유형화되기 이전, 아주 미약하게 발생한 수준으로 얘기하는데요. 그렇다면 기미를 읽는다는 건 앞으로 내가 어떤 사건을 겪을지 미리 알고, 적어도 더 큰 불행을 자초하지 않도록 행동에 유의하는 것일까요? 생장수장(生長收藏)이란 필연적 리듬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잘나가더라도 자만해선 안 된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걸리는 건, 잘나갈 때는 망함이, 망할 때는 잘나감이 미약하게 잠재돼 있는 걸까요?
토론에서는 결과를 예측한다는 의미보다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역량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자기 수양이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는 대체로 자기 뜻대로 되길 바라는 사욕(私欲)에 휘둘리는데요. 그 결과,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하고 갈팡질팡 고민합니다. 하지만 사건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고, 최소한 우리는 지금 나의 태도가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겪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야 내가 덜 후회할 수 있는지는 생각할 수 있겠죠.
이런 점에서 정(貞)은 기미를 읽는 군자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에 대한 해석은 공영달은 우주적 운동(一)으로, 주희는 한결같음(常)으로 조금씩 다른데요. 두 마음을 갖지 않는 상태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연을 본받아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자연이란 리듬을 자기 삶 속에서 체현하는 것이고, 계사전에서는 그것을 ‘정’이라고 말합니다. 비약하자면, 기미를 읽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 혹은 태도를 ‘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황리조>
저희조에서는 吉凶과 貞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계사하전 1장에 보면 吉凶者, 貞勝者也(길과 흉은 정하여 이기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길흉은 무엇일까요? 자연은 늘 변하고 움직이는데 길하고 흉하다는 것이 있을까요? 얻고 잃는 것은 개체의 입장인, 인간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길과 흉을 크게 닥쳐온 사건처럼 생각했는데 다른 분이 찾아온 ‘늙고 죽음, 추위가 변하여 더위가 되는 것도 길흉이라고’ 문장을 읽고 길과 흉이 인간 삶 전체에 크고 작게 있구나를 느껴서 재미있었습니다. 길흉이 변하는 때에 의해 생긴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위의 문장은 보여줍니다. 貞이죠. 흔히 貞은 바름, 곧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저희조에서는 元亨利貞과 관하여 貞이 겨울의 씨앗 같은 잠재태로 해석해도 좋겠다, 씨앗이 있던 것이 펼쳐지는 상태에서 길하다 흉하다가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공영달은 ‘정하면 길흉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길흉을 이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생각이 없고 함이 없는 역의 원리를 따라 적연하여 생각이 없어서 운에 맡겨 행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길흉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寂然할 수 있을까요? 주역에서는 이치를 알면 얽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貞을 파라독사(동시성, 양방향으로) 함께 본다는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가 드러났을 때 다양하고 넓은 차원에서 볼 수 있어야 우리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세상의 운동성- 즉 역의 차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4주차 (3/5) 공지입니다 ***
* 읽을 책 : 『주역정의』 「계사하전」 5장~9장입니다.
* 과제 :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읽으시면서 함께 얘기 나누고 싶은 대목을 골라 어떤 얘기를 나누고 싶은지 간략한 메모형태로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토요일 밤 10시까지 [주역철학]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되도록 다른 선생님들의 글을 읽고 토론에 참여하면 좋겠지요.
* 간식 : 현정쌤, 은정쌤께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