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간은 계사전 1~5장을 읽었습니다. 주와 소와 역주까지 달려서 문장 하나를 읽는 것도 큰일이었네요.
처음 책을 펼친 선생님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던 첫시간^^;; 이번에 읽은 계사전 구절과 주를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보았습니다.
계사상전 1장-천지가 자리잡자 만물의 자리가 이루어졌다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方以類聚, 物以羣分, 吉凶生矣.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정해졌고 낮은 것(땅)과 높은 것(하늘)이 진열되었으니 귀천(貴賤)이 자리하였고 동(動)하고 고요함이 떳떳함(일정함)이 있으니 강(剛)과 유(柔)가 단정(斷定)되었다. 방(方)은 류(類)로써 모이고 물(物)은 군(群)으로써 나뉘니 길(吉)과 흉(凶)이 생겨난다.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是故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하늘에 있으면 상(象)을 이루고 땅에 있으면 형(形)을 이르니, 변화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강(剛)과 유(柔)가 서로 갈리며, 팔괘(八卦)가 서로 추탕(推盪)하는 것이니, 뇌정(雷霆)으로써 고동하며 풍우(風雨)로써 적셔주며 일월(日月)이 운행하여 한 번 춥고 한 번 덥다. 건(乾)의 도(道)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는 여자를 이루니, 건(乾)은 태시(太始)를 알고 곤(坤)은 만들어 물건을 이룬다. 건(乾)은 쉬움으로써 알고 곤(坤)은 간략함으로써 능하다.
易則易知, 簡則易從, 易知則有親, 易從則有功, 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 易簡, 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 而成位乎其中矣.
쉬우면 쉽게 알 수 있고 간략하면 쉽게 따를 수 있으니, 쉽게 알 수 있으면 친함이 있고 쉽게 따를 수 있으면 공(功)이 있다. 친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功)이 있으면 커질 수 있으니 오래할 수 있으면 현인(賢人)의 덕(德)이요, 커질 수 있으면 현인(賢人)의 업(業)이다. 쉽고 간략함에 천하의 이치가 얻어진다.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면 그 가운데에 자리를 이루는 것이다.
-한강백에 따르면 계사상전 1장은 “하늘이 높고 낮음과 귀천(貴賤)의 자리와 강유(剛柔)의 동정(動靜)과 한서(寒暑)의 왕래(往來)를 밝혀서 건곤(乾坤)의 간략하고 쉬운 덕(德)을 성인(聖人)이 본받아 능히 천지의 이치를 봄을 널리 밝힌 것”입니다.흐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지, 건곤, 동정의 자리와 일관성이 정해졌다, 이에 따르면 길함이 생기고 거스르면 흉함이 생긴다 -> 강유(剛柔)가 서로 밀어내며 만물이 운행된다 -> 이 원리는 쉽고 간단하여 따르고 행하기 쉽다'
-왕필에 따르면 건곤(乾坤)은 천지(天地)의 용(用)이고, 주자에 따르면 천지는 음양(陰陽)과 형기(形器)의 실체이고 건곤은 순양, 순음의 괘 이름입니다. 이것들이 존비(尊卑), 제자리를 잡으면서 물건이 제자리를 얻게 됩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동정(動靜), 움직이고 멈추는 것의 일정한 비율을 얻게 되고 강유(剛柔)가 단정(斷定)됩니다. 주자는 천존지비(天尊地卑)를 천지자연에 대한 형용으로, 건곤정의(乾坤定矣)를 역에 대한 형용으로 나누었고 비고(卑高), 동정(動靜)도 일관되게 해석합니다. 건곤(乾坤)을 주역의 건괘와 곤괘로 본 것입니다.
-위(位)는 사물의 차이로 인한 운동성을 전제합니다. 모든 것은 각자의 위(位)가 있고, 그건 만물 중 가장 큰 하늘과 땅을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공영달은 "만약 하늘의 높고 땅의 낮음이 각각 제자리를 얻으면 건곤의 뜻이 정해질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건도가 시작하고 곤도가 마무리하는, 서로 다른 힘이 만나야 만물이 이루어지고 경영될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보편적이기에 알기 쉽고 행하기 쉽기에 일정하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이에 순(順)할 수 있는 것이 현인의 역량[德]이고, 한강백은 이 덕을 성인의 작위하지 않음이라 했습니다.
계사상전 2장-성인이 상(象)을 관찰하여 괘를 만들다
聖人設卦觀象, 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 是故吉凶者, 失得之象也, 悔吝者, 憂虞之象也. 變化者, 進退之象也, 剛柔者, 晝夜之象也. 六爻之動, 三極之道也.
성인이 괘를 만들 적에 상(象)을 관찰하니 글을 달아 길흉(吉凶)을 밝히고, 강(剛)과 유(柔)가 서로 바뀌어[推] 변화(變化)를 낳았다. 이러므로 길과 흉은 실(失)과 득(得)의 상(象)이요. 회(悔)와 린(吝)은 우우(憂虞, 앞으로 닥칠 우환을 미리 헤아림)의 상(象)이요, 변(變)과 화(化)는 나아가고 물러가는 상(象)이요, 강(剛)과 유(柔)는 낮과 밤의 상(象)이요, 육효(六爻)의 동(動)함은 삼극(三極)의 도(道)이다.
是故君子所居而安者, 易之序也, 所樂而玩者, 爻之辭也. 是故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動則觀其變而玩其占, 是以“自天祐之, 吉无不利”
이 때문에 군자가 거처하면서 편안히 여기는 것은 역(易)의 차서(次序)요, 즐거워하면서 익숙히 보는 것은 효(爻)의 글이다. 이 때문에 군자가 거처하면(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상(象)을 보고 효사(爻辭)를 익숙히 보며 동하면 변(變)을 보고 점(占)을 익숙히 본다. 이 때문에 “하늘로부터 도와서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2장은 성인이 괘를 만들 때 상(象)을 관찰하여 효사의 길흉회린을 분별한 것을 밝힙니다. 길흉은 얻음[得]과 잃음[失]의 상입니다. 회(悔)는 “일이 이미 지나감에 마음에 뒤늦게 뉘우침이 있는 것”, 린(吝)은 “일을 당했을 때에 가볍고 비루하고 부끄럽게 여길만한 것”이라고 공영달은 풀었습니다.
-군자는 효의 변화를 관찰하여 점괘의 길흉을 익숙히 보아[玩] 깨닫고, 길흉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효사를 보는 것을 더욱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공영달은 이를 “역(易)의 상(象)을 받들어 따라서 자기 몸을 거처하여 흉해(凶害)가 없다. 이 때문에 하늘로부터 이하가 모두 다 도와주어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소를 달았습니다.
계사상전 3장. 괘와 효의 길흉을 밝히다
彖者, 言乎象者也, 爻者, 言乎變者也. 吉凶者, 言乎其失得也, 悔吝者, 言乎其小疵也, 无咎者, 善補過也.
단(彖)은 상(象)을 말한 것이요 효(爻)는 변(變)함을 말한 것이요 길과 흉은 실(失)과 득(得)을 말한 것이요, 회(悔)와 린(吝)은 작은 하자를 말한 것이요, 무구(无咎)는 허물을 잘 보전(補塡)한 것이다.
是故列貴賤者, 存乎位, 齊小大者, 存乎卦, 辨吉凶者, 存乎辭, 憂悔吝者, 存乎介, 震无咎者, 存乎悔.
이 때문에 귀천(貴賤)을 나열함은 효(爻)의 자리에 있고 소(小)와 대(大)를 분별함은 괘사(卦辭)에 있고 길과 흉을 분별함은 효사(爻辭)에 있고 회(悔)와 린(吝)을 근심함은 개(介, 작은 하자)에 있고, 동(動)하여 허물이 없음은 회(悔)에 있다.
是故卦有小大,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 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이 때문에 괘는 소(小)와 대(大)가 있고 사(辭)는 험하고 평탄함이 있으니 사(辭)는 각각 그 가는 바를 가리킨 것이다. 역(易)이 천지(天地)와 똑같다. 그러므로 능히 천지의 도를 미륜(彌綸)한다. 우러러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굽어 지리(地理)를 살핀다. 이 때문에 유명(幽明)의 일을 알며 시(始)와 종(終)을 따져 궁구하고 반복해 연구한다. 그러므로 사생(死生)의 설(說)을 아는 것이다.
-3장은 괘와 효의 길흉을 말하고, 심오한 이치가 천지를 미륜(彌綸)하는 도를 밝힙니다.
-역(易)에서 무구(无咎)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허물을 잘 보전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 두 번째는 화를 자기가 불러들여서 원망하고 허물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개(介)는 회(悔)와 린(吝)을 미리 우려할만한 ‘소소한 하자’입니다. 주자는 “개(介)는 변별의 단서를 이르니 선악(善惡)이 이미 동하였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때이니, 이때 근심하면 회린에 이르지 않는다”라고 회린에 이르지 않기 위해 살펴야 할 미세한 단서로 봅니다.
-한강백은 유(幽)와 명(明)은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상(象)으로 풀었고, 주자는 유명(幽明)을 귀신세계 유(幽), 인간세계 명(明)으로 풀었습니다.
-미륜(彌綸)의 미(彌)는 미봉하고 꿰매어 합침, 륜(綸)은 경륜함을 의미합니다.
계사상전 4장. 귀신의 변화를 통한 역(易)
精氣爲物, 遊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遺, 通乎晝夜之道而知,
정기(精氣)가 물건이 되고, 혼(魂)이 떠돌아다님이 변(變)이 된다. 이 때문에 귀신의 정상(情狀)을 알아서 천지(天地)와 서로 같으므로 어기지 않으며 아는 것이 만물(萬物)에 두루 하여 도가 천하를 구제하므로 허물이 없으며 사방으로 행하면서도 유음(流淫, 법도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함)하지 아니하며 하늘을 즐거워하고 명(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며 땅을 안정시키고 인(仁)을 돈후하게 하므로 사랑할 수 있으며 천지의 조화를 범위(範圍, 본받고 두루 구비함)하여 허물이 없으며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 빠트리지 않으며 주야(晝夜)의 도를 통달하여 안다.
故神无方而易无體.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 見之謂之仁, 知者, 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그러므로 신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역은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일음(日陰)과 일양(一陽)을 도(道)라 이르니 계승하는 것은 선(善)이요, 성취하는 것은 성(性)이다. 인자(仁者)가 이것을 보면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이것을 보면 지(知)라 이르고 백성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적은 것이다.
-4장은 귀신의 변화를 통한 역(易)의 드러남을 밝힙니다.
-한강백은 精氣를 음양의 두 기가 서로 붙고 화합하는 것으로 본 반면 주자는 음의 精과 양의 氣로 보았습니다.
-한강백에 따르면 도(道)는 무(无)의 칭호입니다. 때문에 어디에나 통하고 말미암습니다. 공영달에 따르면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일(一)은 무(无)를 이르고, 음도 양도 없기에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一)이 无가 될 수 있극 까닭은, 무(无)란 허무(虛无)이고, 허무는 바로 대허(大虛)이기에 분별할 수 없고 하나이기에 일(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사상전 5장. 역(易)의 도(道)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
인(仁)에 드러나며 용(用)을 감추어서 만물(萬物)을 고동하면서도 성인(聖人)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지극하다. 풍부히 소유함을 대업(大業)이라 이르고 날마다 새로워짐을 성덕(盛德)이라 이른다. 낳고 낳음을 역(易)이라 이르고 상(象)을 이룸을 건(乾)이라 하고 법(法)을 본받음을 곤(坤)이라 하고 수(數)를 다하여 미래를 앎을 점(占)이라 이르고, 변하여 통함을 일[事]이라 이르고 음(陰)과 양(陽)을 측량할 수 없음을 신(神)이라 한다.
夫易廣矣大矣! 以言乎遠則不禦, 以言乎邇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 夫乾, 其靜也專, 其動也直, 是以大生焉, 夫坤, 其靜也翕, 其動也闢, 是以廣生焉. 廣大配天地, 變通配四時, 陰陽之義配日月, 易簡之善配至德.
역(易)이 넓고 크니, 멂[遠]을 말하면 그치지 않고 가까움을 말하면 고요하여 바르고 천지의 사이를 말하면 구비하였다. 건(乾)은 정(靜)하여 전일(專一)하고 동(動)하여 강정(剛正)하다. 이때문에 대(大)가 생겨나며 곤(坤)은 정(靜)하면 거두고 동(動)하면 열린다. 이때문에 광(廣)이 생겨나니 광대(廣大)는 천지에 배합하고, 변통(變通)은 사시(四時)에 배합하고, 음양(陰陽)의 의(義)는 일월(日月)에 배합하고, 이간(易簡)의 선(善)은 지덕(至德)에 배합한다.
子曰, “易其至矣乎! 夫易, 聖人所以崇德而廣業也. 知崇禮卑, 崇效天, 卑法地. 天地設位, 而易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공자(孔子)가 말씀하였다. “역(易)은 지극하다 할 것이다. 역(易)은 성인(聖人)이 덕(德)을 높이고 업(業)을 넓힌 것이다. 지(知)는 높고 예(禮)는 낮으니 높음은 하늘을 본받고, 낮음은 땅을 본받는 것이다. 천지(天地)가 자리를 베풀면 역(易)이 이 안에서 행해지니 본성을 이루고 존재를 보존함이 도의(道義)의 문이다.”
-5장은 역(易)의 도(道)가 커져서 신공(神功)과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
-成性存存, 道義之門: 한강백은 물건을 보존하고 이룸이라고 했고, 공영달는 성성(成性)을 ‘물건이 처음 생겨날 때 본성을 받아서 이룸’으로, 존존(存存)은 ‘물건이 죽어 없어지기 전까지 그 존재를 보존함’으로 보았으며 도(道)를 ‘물건이 처음 생겨날 때 개통됨’, 의(義)를 ‘물건이 마땅함을 얻음’으로 보았다. 주자는 성성존존을 ‘본래 이루어져 있는 지(智)와 체(體)의 본성을 보존하고 또 보존함’의 의미로 보았다.
성위(成位)
계사전은 하늘과 땅이 각자의 자리를 잡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천지만물 가운데 가장 큰 두 가지가 자리를 잡자 만물이 각자 자리를 얻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기준점이 되면 그제야 사람들이 정렬하는 것처럼. 하지만 획일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오히려 계사전은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를 이루는지[成位]를 말합니다. 가령 하늘이 높고 땅이 낮아야 사람의 자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계사전 1장 마지막에 나오는 성위(成位)라는 말을, 주자는 사람의 자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너무 쉬운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자기 자리를 알고 순(順)하는 것은 역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는 현인의 덕(德)이 있어야 자리를 오래 보전할 수 있다고 하죠. 보통은 자리를 벗어나려 해서 화를 자초하고 만다고요.
<중용> 14장에서는 "군자는 마땅한 자리에 바탕 하여 행하고, 그 외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라고 말합니다. 부귀, 빈천, 이적의 침입, 혼란스러운 때, 군자는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자득(自得)"이라 합니다. 이 구절이 재밌는 이유는, 상황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는 것이 자신을 유지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황이야 어떻든 늘 하던 대로 사는 것을 '나다운' 일이라고 말하곤 하니까요. 상황이 달라져서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을 싫어하고요. 하지만 계사전이나 중용에 따르면 그건 남 탓을 하는 일인데다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하늘과 땅이 높고 낮은 이후에 있는 ‘나’이기 때문에 온갖 것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입니다. <중용>은 이를 간과하고 간신히 유지하는 자아는 소인이 추구하는 요행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 자리에 바탕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노자라면 <중용>이 말하는, 변화하는 상황의 밑바탕은 소박함[樸]이라고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자는 “욕망이 일어나 만물이 저절로 화(化)하는 것이 어그러지면 이름 없는 박(樸)을 통해 진정시키겠다[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도덕경> 37장]”고 했습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부귀니 빈천이니 하는 건 노자 입장에서 보면 사후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름 없는 도(道)의 작용이 먼저 있을 뿐입니다.
자리[位]는 사물마다 각각 다르게, 차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成].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매번 바뀌고, 그때마다 이전의 자리를 고집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조별 토론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모두가 주인공인 연극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주인공을 하면, 누구는 그 상대역을 해야 전체 판이 돌아갑니다. 작품 전체를 보면 모든 역할에 우열은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가 있을 뿐이죠. 하지만 ‘주인공’이라는 이름에 연연하고 급기야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불공평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계사전은 이 협소한 시야를 넓히기 위해, 자기 자리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알기 위해 성인은 상(象)을 살피셨다 한 게 아닐까요?
만만찮은 분량을 이렇게 다 정리해 주시다니 ㅋㅋ.
주역정의 읽는 중에 일( 一)의 의미가 다가오지 않아서 지금도 몽롱합니다. 혜원 샘 정리본 읽으면서 좀 정리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성위(成位) 멋지게 정리해 주셨네요. 이름으로만 익숙한 <중용>과 <노자>와 연결하여 정리해 주시니 짱! 애독하고 탐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