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샘이 이번 주 분량을 꼼꼼하게 정리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매번 그렇게 해 주신다니, 우리로선 잘 활용하시면 될 것 같고요^^. 여기서는, 각 조의 토론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내 주신 것을 묶어서 올립니다.
주역 토론 첫시간에 <계사전> 1-5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던데다 워낙 방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주역 텍스트에 대한 이해들도 제각각인지라 세 조 모두 첫 시작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깊게 읽어 내용을 꿰고 있는 누군가가 주도해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이해들을 모아서 근근히 밀고나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안정감있게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황리조에서는 천지, 건곤, 길흉 등과 같은 주역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잠깐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끝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도 힘들어 샘들이 정리해 오신 내용들 중에서 주역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우선 주역은 ‘천지’에서 시작하는 사유라는 것(천지 코스몰로지), 하늘과 땅의 상호적인 운동성과 변화를 온갖 생명과 인간 삶의 토대이자 준거로 삼는 철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윤리 또한 거기서 비롯되어야 함은 물론이고요. 하여 우리가 관심갖는 길흉회린이라는 것 또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대한 우주 자연의 질서와 리듬 속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우리의 몫이 될 터, 그 최고의 경지가 바로 ‘낙천지명’이 아닐까 싶다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하늘을 즐거워하고 명을 즐기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일텐데, 이는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사건과 변화를 긍정하는 것이자 사물의 시작과 끝을 아는 것과 연관되는 일일 것이며 나아가 이는 드러나는 것(가시적인 것, 현실화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비가시적인것, 잠재적인 것)의 관계(幽明之故)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 ‘하늘이 도와서 길하지 않음이 없는’ 상태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낙천지명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까지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물론 매듭은 지어지지 않았지만요(ㅜ).
그밖에도, 세계는 그 자체로 알기 쉽고 따르기 쉬운(易簡),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우리는 자신의 표상체계와 알음알이로 인해 그것을 굴절 왜곡시킴으로써 역과 자연의 이치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이걸 넘어갈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됐고, 나아가 그 유명한 ‘신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역은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神無方易無體)’이라는 구절에 대한 얘기들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졌는데 매력적인 대목인만큼 앞으로 계속 화두로 삼아 토론하면서 이해를 도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주역 정의>를 읽으면서 새롭게 확인하게 된 것이, 이 텍스트가 확실히 노자적 사유에 기반한 해석이라는 점이었는데요, 그런 면에서 虛와 無, 그리고 神 등의 노자적 개념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규창조 토론>
메모는 길흉(吉凶), 이간(易簡), 관상(觀象), 계사(繫辭), 신(神) 주로 이렇게 정리가 됐는데요. 이 중에서 길흉과 이간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습니다.(ㅋ)우선, 길흉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을 비롯해 자연의 운행 중 무엇을 두고 길하거나 흉하다고 할 만한 건 없죠. 그러나 길흉도 하늘과 땅의 운행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주역의 독특한 사유죠. 하늘과 땅의 운행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길흉도 바라보도록 훈련하는 게 저희가 주역을 읽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흉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인간의 자의식을 벗겨내면 모든 길흉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한 단면이니, ‘길흉은 없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모든 사건은 중립적일 수만 없으니, ‘길흉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우선, 길흉에 대해 계사전은 그것이 실득(失得), 잃고 얻음에 불과하다는 부분인 듯합니다. 생각의 범위가 고작 ‘나’에 국한된 우리는 나의 잃고 얻음의 경험을 곧장 흉함과 길함으로 투영합니다. 나에게 길한 사건과 흉한 사건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세상의 법칙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고찰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길흉이 유효하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있었지만, 정리가 안 되네요. ㅋㅋ
그 다음, 이간은 내용보다 우리가 이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나눴습니다. 흔히 ‘주역의 언어는 이간하다’고 얘기들 하죠. 이때 ‘이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토론에서는 이간을 ‘간단명료하다’라고 풀었던 것 같은데, 제 생각에 그건 동어반복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두 가지로 정리가 될 것 같은데요. 주역의 언어가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도록 쓰였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걸까요? 아니면 현인의 행위를 수식하는 단어로서 건곤(乾坤)과 같은 역량의 형식을 가리키는 걸까요? 느낌상으로는 두 가지 다 연결될 것도 같은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토론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옥조 토론>
계사전 읽기의 첫 시간이라, 저희 조에서는 주역을 읽는 큰 틀을 보고자 했습니다. 중심 내용을 훑으려고 했는데, 1장을 겨우 보았습니다. 4,5장이 중요한데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고 앞으로 계사전을 읽으면서 계속 짚어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쪽글에 써오신 것을 중심으로 보면, 먼저 체용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건곤이 體라고 했는데, 健順을 체로 보면, 건곤이 用이 된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어요. 건(乾)과 곤(坤)은 만물의 생성, 변화의 근원적인 힘이죠.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부분에서 體라고 말한 것이고, 체용의 관계도 어떤 것을 중심에 놓고 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건(乾: 하늘)의 에너지는 건(健: 강건함)으로 드러나기에 乾과 健의 관계에서는 강건함이 체가 되는 것이겠지요. 이 체용론은 하나라(연산역)와 은나라(귀장역)의 역이 아니라, 주역이 가진 태양력을 중심으로 64괘를 해석하며 건곤을 근원적인 힘으로 규정하려 한 것이 아닐까라는 정도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가져온 질문이 길흉에 대한 것입니다. 方以類聚, 物以羣分, 吉凶生矣.부분인데요, 方에는 類가 있고 物에는 群이 있는데, 類가 아니면서 모인 것이 있다고 하니 經과 다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죠. 애견, 애묘는 동물이니 사람과 견주어 보면 類가 이닌 것이고, 가족의 틀로 보면 類인가, 라는 부연 질문도 있었어요. 정의의 해석에서 예로 드는 것이 ‘인간과 금수는 다르니 같은 類로 보지 않고, 남과여는 다르지만 같은 類로서 모여 산다,’ 라고 하며 음이 양을 구하고 양이 음을 구하는 것, 즉 음양이 다른 것이 다른 類라고 했습니다. 토론을 깊게 하진 못했는데, 方을 道를 의미하고, ‘方이 같은 것이 함께 모이는 것’이라고 했지죠. 중요한 것은 무엇을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이냐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것이 모일 때도(類) 같은 동일함으로 보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하고, 다른 것이라도 도에 합치하면 聚할 수 있고, 무리(群)를 이룰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같은 것이 모일 때 오히려 신중하게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연관된 질문으로 그럼 物에도 吉凶이 있다는 것이냐? 라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길흉이 得失이라고 말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얼마나 합치를 이루는가의 문제로 보입니다. 단순히 物의 다름이 아니라 나-물-사과(得), 나-물-청산가리(失)이 되는 것이죠. 너무 많이 먹을 때 독이 되는 것도 적정한 합치를 이루면 得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같은 바를 순히 따르면 길하다’ 라고 할 때 ‘같은 바’는 물의 종류가 아니라 ‘합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物자체에 길흉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는 말이기도 하구요. 토론을 위한 시간이 좀 부족하네요.
첫 시간이라 토론의 방향도 잡기 힘들어(쪽글로 말해야 할지, 계사전의 큰 틀로 얘기해야 할지) 종횡으로 헤맨 거 같은데 정리된 글을 보니 뭔가 많은 일을 한 거 같네요.
토론 시간의 부족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 같네요. 이 많은 내용을 그 짧은 시간에 메뚜기 뛰듯 건너가야 하는 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