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동양철학팀은 벤자민 슈워츠의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1, 2장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함께 읽는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와 더불어 중국철학을 공부한다면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저도 이번에 만나게 되었네요. 두 책 모두 <주역>이 속한 유학뿐 아니라 중국의 전체 사상적 흐름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저처럼 무작정 <주역>만 읽어서 이것이 생겨난 때의 역사적 배경지식이 별로 없던 차에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나 당시에 융성하던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 속에 <주역>과 유학을 놓고 볼 수 있어 재미지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중국이 역사시대로 접어들고 중국문명의 방향설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BC2300년~BC770년경 등장한 하(夏), 상(商), 주(周)나라 시대에 어떤 공통의 사상적 담론들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이런 문화 방향 설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혈족에 바탕으로 한 조상 숭배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상이란 단순히 나의 직속 조상 의미의 조상 숭배라기보다는 인간을 낳고 살게 하는 근원적 원리인 천지 자연현상과 같은 보이지 않는 힘/신들에 대한 숭배 혹은 이런 힘/신들과 통하는 자들이 왕이 되고 이 계보가 이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조상 숭배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혈통을 바탕으로 한 조상 숭배 사상은 한편 생물학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공동체 내 유대감과 결속감을 공고히 하는 종교적인 역할과 동시에 적장자 계승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전략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씨족 수호신인 ‘제(帝)’를 세우고 이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건 상(商)나라까지는 여전히 제한된 종족과 영토에 국한된 원시 부족 왕조의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상나라의 ‘제(帝)’에 대한 숭배는 인간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에 대해 합리적 이해보다는 점을 친다거나 희생양을 바쳐 신의 노함을 누그러뜨리는 식의 주술적 의미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BC1200년경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을 무렵이 되면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의 축적으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이런 힘들을 무턱대고 두려워하지 않고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이치를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대 이후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계사전에서도 귀신은 음양의 신묘한 작용일뿐이므로 두려워하지만 말고 이런 이치를 궁구히 하여 변화의 도를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나라에 이르면 만물을 낳게 하는 힘이지만, 주술적인 의미로 접근했던 ‘제(帝)’는 보다 지성적이고 보편적 관점인 ‘天’으로 대체됩니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 왕 혹은 천자는 천지의 법도나 이치를 깨달은 자여야 하며 그런 자가 천하를 다스려야만 인간과 만물을 우주의 법도나 이치에 맞게 풍습과 법도를 만들 수 있어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하고 계속 이어지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토론에서는 이런 주나라의 조상 숭배, 혹은 천에 대한 숭배가 어떻게 보면 ‘미리 정해진 신성한 법도’에 부합하도록 하기 때문에 계급적인 위계를 정당화한다거나, 주어진 것을 너희들은 따르기만 하라는 식의 고도의 정치적인 장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필자도 ‘천명사상의 심층에서 보이는 것은 당위적 인간 질서와 현실적 인간 질서 사이의 괴리’를 지적합니다. 즉 인간의 현실에서는 왜 이렇게 이런 우주의 원리를 실제 인간의 삶에서 그래도 비스므리하게 라도 구현하는 왕들은 드물고 말 그대로 ‘개차반’인 왕들이 수두룩한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죠. 이런 문제의식이 공자를 위시한 이후 유학에서 보이는 ‘비판정신’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팀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민해 보았는데요. 샘들은 원리들이 현실지평에서 가져왔을 때는 그대로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많은 정황들이 있기 때문에 둘의 모순이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어떻게 보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게요. 이간(易簡)한 음양의 원리로 살아가는 우리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신체에 시공간에 매여있는 존재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야할 디폴드 값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왜 이런 이간한 우주의 이치를 왜 구현하고 살지 못하는가 자책하거나 좌절보다는 차라리 이런 피할 수 없는 이런 한계 지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도 우주적인 원리를 쬐끔이라고 구현하면서 간이(簡易)하고 담백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고 매순간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 합니다.
* 다음주 동양철학팀 과제: 도올샘의 <중용 인간의 맛> 1장 천명장까지 읽고 정리합니다.(+보충교재 우응순샘의 <친철한 강의 중용> 일독도 강추)
오우~~ 정리의 달인으로 등극하시나요?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정리 넘 좋네요. 더욱이 '간이하고 담백한 삶'이라는 같은 질문을 쥔 벗이 있으니 저로선 더 좋네요.
후기 잘 읽었어요~~^^
우리의 토론을 이토록 있어보이게 정리를 해 주시다니~~~덕분에 우리의 앞길이 즐거운 가시밭길이 될 거라는 확실한 예감이 드네요. 동철 파이팅!!! ㅋㅋ
아...우리가 이런 건설적인 토론을 했다니...동철팀ㅋㅋㅋㅋ의 빛과 소금같은 후기입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