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그런가요? 2, 3월에는 시간이 하루하루 엄청 더디고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느낌인데 10월부터는 시간이 그냥 후루룩 술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거요. 네네 그렇습니다. 벌써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괘들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마무리를 잘 해보자고요.
이번에는 갈등과 분쟁의 대표 괘들인 천수송(
天水訟, ䷅)괘와 화택규(
火澤睽, ䷥)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는 것은 언제나 갈등이나 불통, 어긋남이나 불편함을 마주하게 되고 그래서 이것들과 이리저리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것의 연속이라 이번 괘들은 매우 흥미있었는데요. 이번주는 사정상 두 팀으로 나누어 토론을 했는데 어떤 말이 오갔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규창팀>
천수송괘와 화택규괘의 공통점은 분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천수송괘의 괘상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하늘과 아래로 내려가는 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화택괘의 괘상을 보면, 불이 위에 있으면서 타오르고, 못이 아래에 있으면서 내려가서 서로 어그러지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괘가 모두 어긋남이 발생한 상황이지만, 그 어긋남의 상황이 다르게 이야기된다는 점입니다. 천수송괘에서 발생하는 분열은 ‘타협할 수 없는 갈등과 다툼’의 양상으로 펼쳐지지만, 화택규괘에서 발생하는 분열은 한 집안에 살던 두 여자가 각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는 듯한, 뜻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토론에서 저희는 화택규괘의 독특함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긋나고, 분열하는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주역에서는 어긋남을 곧 불화로 보지 않는다고 말이죠. 화택규괘의 단전을 보면, “천지가 어긋나나 그 일이 같고,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나 그 뜻이 통하고, 만물이 어긋나나 그 일이 같으니, 규의 때와 용이 크다.”고 말합니다. 주역에서는 그러한 힘의 차이, 방향의 차이, 욕망의 차이가 결국 생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토론에서 주역은 분열하는 운동의 이미지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천수송괘를 토론하면서 주로 이야기를 나눈 부분은 괘사의 ‘리견대인(利見大人)’과 상전의 ‘작사모시’(作事謀始)입니다. 천수송괘의 괘사에서는 송괘의 상황을 끝까지 가지고 가지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하나의 대안으로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토론에서 저희는 갈등, 부조화, 쟁송의 상황에서 우리가 ‘대인’을 만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금 내게 처한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제 3의 인물을 만나는 것일까? 만나지 못한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등등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대인을 꼭 자기 외부의 인물로 규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와 지금 우리가 하는 고전 읽기도 대인을 만나는 것 중 하나가 아닌지 확장해서 해석해보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작사모시’란 공자께서 쟁송의 때에 ‘일을 할 적에 시작을 잘 도모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공영달의 경우에는 시작을 잘 도모한다는 것을 쟁송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제도를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지금 시대에 법과 제도가 촘촘하게 설정되어 있는데, 또 법과 제도를 분명하게 만든다고 하여서 쟁송이 해결될까? 시작을 잘 도모한다는 말을 제도가 아닌 다른 맥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질문을 나눴습니다. 토론에서 ‘작사모시(作事謀始)’를 어떻게 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정리되지는 않고 끝났지만, 저희는 쟁송의 상황은 누군가 한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분쟁이라는 점을 공유했고,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일 때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보다는 시작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나눴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쟁은 사소한 사건이나 작은 어긋남에서 촉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시선이 좁아지고, 맥락없이 상대를 악마화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일을 할 적에 시작을 도모한다’(作事謀始)는 것은 더 큰 맥락 속에서 다툼을 바라보고, 이야기해보는 시도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질문이 듭니다.
<황리팀>
자신의 옳음에 대한 마음이 확실한데, 억울함이 생겨 송사(訟事)를 벌여 시비를 가리는 때인 송괘와 상대방의 행동이나 태도가 나와 달라 자꾸만 어긋나 때인 규괘는 갈등이나 분쟁으로 상대방과 대립하고 이로 인해 마음이 불편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송괘는 하괘 감(坎,☵), 상괘 건(乾,☰)이고 규괘는 상괘 리(離,☲), 하괘 태(兌,☱)로 두 괘 모두 상하괘의 운동방향이 각자의 길을 가서 서로 만나 통하지 못하는 형상을 보여줍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자꾸만 억울한 일에 휘말리게 되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거나 혹은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그냥 최대한 무시하며 서로 각자 갈 길 가며 사는 모습과 비슷하죠. 이런 때에 우리는 보통 나의 억울함과 정당함을 증명하려고 소송을 해서라도 시비를 따지게 되는데 그렇다고 마음이 후련해지지 않고 대신 관계가 어그러진다거나 오랜 소송으로 인해 다시 마음을 다치게 됩니다. 혹은 마음이 맞지 않아 늘 대립하기만 할 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아무리 모른 척 무시한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갈등이나 어긋남이 있을 때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해오던 대로 시비를 따지거나 무시하는 방식만 쓰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는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길을 내야 할지 여전히 서툴고 무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과 규의 때에 주역에서는 어떻게 보라고 하는지 궁금해졌는데요.
우리 조에서는 송괘에서 ‘마음속에 진실이 있다’고 하는 ‘
有孚’와 쟁송을 끝까지 하지 말라는 ‘
不克訟’ 대해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보통 ‘
有孚’는 마음속에 진실이 있다는 뜻으로 내적 진실함이나 떳떳함이 외부의 관계에도 드러나서 신뢰를 얻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데요. 그래서 ‘
有孚’는 사심에 사로잡힌 치우친 마음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천지의 이치를 읽고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하지만 송의 때에는 이런 ‘
有孚’가 처음에는 각자가 자신이 맞고 올바르다는 강한 확신으로 이런 마음이 쟁송을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토론에서 이렇게 유부를 사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전체적인 관점이나 맥락 위에 나를 놓고 본다해도 우리들은 존재의 특성상 자신의 치우친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무 일도 안 했음에도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해도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그것이 일이 되어가는 이치일 수 있습니다. 다만 개체적인 관점에서는 미처 헤아릴 수 없는 때라고 볼 수 있죠. 이럴 때 나름 ‘
有孚’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송의 때에 막히고 답답한 상황을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
窒惕’ 막혀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즉 송의 때를 만났을 때 나의 진실하고 옳다고 믿고 있는 마음이 정말로 전체적인 차원에서 고려됨인지를 신중하게 돌아보고 다시 한번 중(中)을 잡아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신중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나의 ‘
有孚’를 믿고 무턱대고 송사를 밀고 나가면 더 큰 험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송괘에는 송사를 끝까지 가지 말라는 당부가 무척 많은데요. 그렇지만 이것은 송사는 안 좋으니 하지 말고 그냥 참고 넘기라는 뜻은 아닌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즉, ‘송사는 이길 수 없다’는 ‘
不克訟’은 이것이 자신의 이익됨만을 위해 소송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이지 어떤 때에는 개인적인 불편함을 감당하고서라도 시비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봐야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인을 봄이 이롭다(
利見大人)’의 ‘대인’을 외부에서 존재하는 시비의 결과를 판결해줄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올바름(
有孚)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선배나 친구와 같은 타자나 책 혹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자신이 모두 대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규괘는 괘사가
睽 小事吉 (규는 작은 일은 길하다.)로 간단합니다. 어그러지는 때지만 작은 일이나 길하다고 하는 것이 어떤 말인지 궁금했는데요. 괘상에서 보듯 리(離,☲)괘, 아래에 태(兌,☱)괘로 상하괘의 운동 방향이 다릅니다(火
動而上 澤
動而下). 또한 리괘를 중녀, 태괘를 삼녀로 보아 두 자매가 현재 한집에 살고 있지만 다른 곳으로 시집가 뜻이 다르게 움직인다(二女同居
其志不動行)고 봅니다. 즉, 규의 때에는 뭔가 겉으로 드러나는 운동성(
動)이 정반대로 움직여 서로 어긋나게 보이고 영영 만날 것 같지 않고 대립해 보이는 때를 보여줍니다.
이런 때에 대상전이
同而異(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의 이치가 같음을 보는 태도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전에서 태괘와 리괘의 성질이 기뻐하면서 밝음에 붙는 성질(
說而麗乎明)을 가지고 있다고 풀어줍니다. 불과 물은 상극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이 물을 데워 음식을 삶아 익히는 같은 이치/작용(用)을 합니다. 이를 단전에서는 ‘천지가 어긋나도 그 일은 같고, 남녀가 어긋나도 그 뜻은 통하며, 만물이 어긋나도 그 일이 같아서 규의 때와 씀이 크다(天地睽而
其事同也, 男女睽而
其志通也, 萬物睽而
其事類也, 睽之
時用大矣哉!)’는 말을 길게 하고 있는데요. 이를 공영달은 규의 뜻이 두 체(體)는 불과 물로 어긋나나 用(작용, 만물을 생성하는 원리의 작용)을 함께 동시에 하여 만물을 이루어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고, 전혀 뜻이 달라 보이는 작은 것들(小事)이라도 이들은 옆으로 밀어내거나 모른 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 나의 존재나 드러남을 증명할 수 있으며, 결국은 같은 생성의 원리를 가진 것임을 이해하므로 적극적으로 응하는 대상과 만나고 통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同而異 라고 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규괘에서는 모든 효사에서 자신과 응하는 상대를 그것이 나와 같은 류의 사람이든 나쁜 사람으로 보이든 혹은 처음에는 의심이 들고 나에게 도움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사람이든 어떻게든 만나려고 움직여 이들과 통하려고 애쓰라는 당부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그러지고 불화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세상에 난 이상 한 상태로만 수 없는 움직여 변화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따라서 생성과 운동의 존재로서 만물은 길흉회린을 겪을 수밖에 없죠. 그런 의미에서 규의 때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小事吉이란 나와 너무 다르거나 상관 없어서 사소하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도 그 이치에서는 함께 하며 서로의 생성에 필요한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이 규의 때를 살아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주차 (10/15) 공지>
* 오전 읽을 괘 : 천택리, 지산겸입니다. 각 조에서 돌아가면서 발제하시고 주역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4학기 수업방식: 채운샘께서 4학기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브리핑을 하셨는데요. 정리해보면
- 오전: 지난 학기와 동일하게 동서양철학강의와 주역 괘토론
- 오후: 최종에세이 준비를 위한 글쓰기 토론팀으로 운영됩니다.
* 최종에세이 과제: 우리가 보고 싶은 사회적 문제를 주역을 통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괘를 정하고 그것을 서괘전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앞 뒤의 괘들을 연결해서 문제를 입체적으로 분석해보는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샘께서 제시하신 예시를 보면 다양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제나 억압과 같은 사법체계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교육이나 문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하고 이질성을 뭉개지 않는 노력에서 화뢰서합-산화비-산지박괘를 엮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오후 과제: 이런 식으로 이번주에는 가족, 배움, 경제, 환경문제 등등에 대해 관심이 가는 주제를 정하시고 그 문제를 어떤 괘의 어떤 부분을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잡아 오시면 되겠습니다. 4학기 에세이 대략적인 일정은
2주차 : 주제 잡기
3~6주차 : 괘 분석 및 분석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 수집 글쓰기
7~8주차 : 초안쓰기
9~10주차 : 퇴고
11주차 : 발표
* 간식 : 미연, 은주샘께 부탁드립니다.
*** 아 그리고 4학기 시작과 함께 기쁜 소식이 있었죠.
바로바로 새로운 64괘 암송성인
의 탄생과 파티가 있었습니다. (** 64괘 암송성인 지난 인터뷰 영상 링크 GoGo!
http://qmun.co.kr/story/?mod=document&uid=575)
그 주인공들은 바로바로 공부를 전쟁처럼 하셨다는 주자
주희수님과 공자 32대손이시자 13경주소를 다신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공영달
공경달님이십니다!
두 분 모두 소처럼 성실하신 태도로 암송의 과정을 매진하셨는데요. 실제로 두 분의 암송을 봐주신 분들의 증언으로는 암송파티 전부터 이미 64괘를 달달 외우고 계셨음에도 마지막까지 암송쪼가리를 손에 놓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총 암송시간이 40분이 안 되는 대기록을 세우셨습니다. 그 덕에 우리는 또 조촐하게 회식파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짝짝짝!! 축하드리고요. 다음 도전자분들도 얼른 도전하셔서 주역공부의 깊이를 더하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역시나, 명쾌하고도 빠짐없는 공지 감사합니다. 주휘수 샘과 공경달 샘 두 분 샘 덕분에 주역에 대한 애정이 새롭게 샘솟았음을 고백합니다(ㅋ).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학기는 심기일전의 각오로, 글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첫모임이니만큼, 그간 각자의 글쓰기에 대해 돌아보면서 이번 학기에 써보고 싶은 주제에 대해 마구 털어내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힘내서 달려보아요!!!
공지 못쓰겠다고 툴툴하시더니 이렇게 잘 쓸려고 그러셨구만요. 글쓰기를 훈련하는 마지막 학기인데, 기회가 아깝지 않게 몰두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암송으로 홀가분해진 두 분 샘들의 미소가 유독 환합니다 ㅋㅋ
앗.. 제가 저 대열에 끼는 날이 오다니 ~ 그 날은 64괘 암송에 정신이 팔려 수업의 괘가 무엇인지도 기억이 안났는데 안회님의 꼼꼼한 후기 덕에 분열과 갈등의 두 괘를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화택규괘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만나려고 움직여 이들과 통하려고 애쓰라는 당부들"은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스런 한주였슴돠. 암송만으로 금방 답이 나오진 않더라능 ㅎㅎ 하지만 암송의 과정에서 이미 여러 기쁨을 맛보았기에 모두 도전해 보시길 적극 추천합니다! 외울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도와준 팀주역 샘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드디어 주희 수가 탄생했네요!! 감축드립니다!! 그리고 공경달까지~ 경순샘이 지난번 산행에서 내려올때 저와 담소를 나누셨던 분이 맞는지....정이천(정랑)샘의 친구분이신가? 여튼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어요~^^ 암송의 기쁨은 암송자의 얼굴에서 다 드러나나 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