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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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효의 위치에 음효와 양효를 하나씩 갖고 있는 리괘와 겸괘는 뜻이 선명하여 쉽다고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주역은 중층의 사고로 우리를 혼돈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리괘와 겸괘는 덕의 터전과 자루로 계사전에 나오는데요, 어떻게 밟다와 겸손함이 연결되는지 과제를 하면서는 몰랐습니다. 토론의 결과, 다시 말해 집단지성의 힘 덕에 저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덕을 쌓기 위한 기초, 즉 터전은 행(실천)함이고, 그 자루, 꼭 쥐고 가야할 것은 겸(通)의 원리라는 거죠. 각 조별 후기를 참고로 더 이해해보아요~
암송을 끝내니 미뤄두었던 후기 쓸 차례들이 밀려오는데 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암송이 제일 쉬웠어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정옥조
호랑이 꼬리를 밟았지만 사람을 물지 않아 형통하다는 履괘는 하나있는 음효인 육삼이 양효인 구이를 밟고 있어 위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기쁘게 건에게 응해서 형통하다고說而應乎乾 하는데요, 저희 조에서는 이 위태로운 상황을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취약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리괘는 취약한 인간이 어떻게 호랑이 꼬리를 밟고도 물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주는 희망의 괘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호랑이 꼬리를 밟으면 호랑이가 일어나서 무는 게 정상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형통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괘라는 거죠. 존재론적 취약성이란 인간은 무언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데 그게 어떤 것 인줄 모르고 먹어야 하니 그 자체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일 수 있고 또 인간은 외부의 상황에 대응하는 게 다른 맹수들에 비해 약합니다. 그래서 문명을 만들어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밟은 상황에서도 먹어야 사는데 이는 아주 다른 존재와 교류해야 살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이런 조건 자체가 우리를 형통하게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타자를 수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형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고 형통한 이유를 ‘기뻐하면서 乾에게 응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때의 乾은 ‘강정의 덕을 가진 자’라고 왕필은 주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그 덕을 아직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을 수 있으니 이를 건괘의 군자 종일건건처럼 늘 행하는 태도로 보면 우리도 물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리가 밟다, 행하다의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늘 행함으로써 형통할 가능성에 다가가는 것이죠. 또 ‘밟다’라는 것의 중의적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꼬리를 진짜 발로 콱 밟아서 밟은 것이기도 하지만 족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공자의 길을 밟아가겠어’라고 할 때처럼 말이죠. 스승을 믿고 따르며 공부할 때 스승과의 관계 혹은 함께하는 벗들과의 관계도 그냥 친한 관계가 아니라 책선이 오가는 위태로운 관계로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또 한발 나아간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說而應乎乾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대상전에서 하늘 아래 연못이 있는 상을 사물이 제자리에 마땅히 있음으로 보고 상하를 분별하여 백성을 안정시킨다고 말하는데, 서로 다른 물건들이 모여 있을 때 필요한 것이 전체와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살펴 그에 맞게 행하는 것을 예라고 한다면 履는 禮(卽履禮也)라고 말한 부분과 통합니다. 그래서 이력서履歷書에 스펙을 쓸 게 아니라 살면서 자기가 얼마나 예를 실천했는지를 써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구이효를 설명하면서 리의 도는 겸손함을 숭상한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자연스럽게 겸괘로 이어졌습니다.
謙은 ‘자기 몸을 굽히고 남에게 낮추어서 남을 먼저 하고 자기를 뒤에 하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저는 겸이 그저 예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요. 그런데 단전을 보면 전혀 다르게 얘기하죠. 천도는 아래로 내려가 구제하고 지도는 낮추어 위로 행한다는 말에서 상하가 서로 교통하여 만물을 구제함을 말합니다. 이어 하늘과 땅, 귀신과 인간 모두가 가득함을 이지러지게 하고, 변하게 하고, 해치고 싫어해서 겸손함으로 보태주고 흐르게 한다는데 이는 차면 기우는 우주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겸이란 단지 인간 차원에서의 예스맨이 아니라 차면 기운다고 하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역 전체를 대표하는 원리로도 볼 수 있죠. 이렇게 꽉 찬 거는 덜어내어 만물이 돌아가는 것처럼 내가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런 관계들을 만드는 게 겸손이고 이를 행하는 게 예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겸을 떠올릴 때는 예스가 아닌 ‘通’이라는 개념을 먼저 떠올리자고도 얘기했죠. 통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뜬금없이 느껴졌던 군자유종이라는 말도 좀 이해가 됩니다. 군자가 겸을 행하면 끝마침이 있다는 이야기는 終이 끝이 아니라 만물이 통하여 순환한다는 논리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자기 몸을 굽히고 남에게 낮추어서’라는 것은 이런 원리를 터득한 군자가 관계에서 행하는 지극한 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상전의 裒多益寡, 稱物平施부다익과 칭물평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들이 있었는데요, 부裒가 덜다와 모으다의 상반된 뜻이 있는데 정이천의 해석이 덜다에 가깝다면 왕필은 모으다 쪽입니다. 재물을 덜어 공평하게 나눈다는 뜻도 있고 이를 좀 더 넓게 보면 높은 사람은 빛나고 낮은 사람은 넘을 수 없다는 표현에서 근기가 있는 혹은 덕 있는 사람이 겸손을 행하면 그 품이 더 넓어지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를 둘 다의 뜻으로 해석해 볼 수 도 있겠다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황리조
구덕괘 넘버 원과 투의 자리에 해당하는 天澤履와 地山謙 괘. 리괘는 덕의 터전(德之基), 겸괘는 덕의 자루(德之柄)라고 한다. 두 괘는 여섯 효의 모두의 음양을 바꾸면 만들어지는 배합의 관계를 이룬다. 거울쌍과도 같아서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괘변을 할 때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禮의 실천이라 할 만한 履와 스스로를 낮추어 물러나는 힘이랄 수 있는 謙. 우리 조는 이 두괘가 왜 덕의 터전이고 자루일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천택리'의 괘명인 履는 밟다, 걷다, 행하다는 뜻으로, 살아가다는 의미로까지 폭넓게 해석된다. 다섯 양효들 가운데 자리잡은 육삼효는 연약한 몸으로 거친 세상과 부딪쳐 살아가야 하는 개체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서괘전>에서는 물건이 축적되고 사람이 모이면 禮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풍천소축' 다음에 '천택리' 괘가 왔다고 푼다. 履=禮. '예'라는 것이 개인들이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질서나 가치, 관계의 체계라 한다면 살아감과 禮가 연결되는 건 자연스럽다. 인간은 하루라도 禮를 밟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대상전>은 이를 이어받고 있다. 辨上下 定民志. 하늘이 위에 연못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같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상하좌우 인간 관계의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통치윤리를 도출한다.
그런데 괘사와 효사들을 보면, 질서나 예법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이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삶의 자세들을 강조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천택리 괘가 구덕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핵심 이미지는 호랑이 꼬리를 밟는 자의 모습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과도 같은 위태로운 일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삶의 조건이라는 것일까? 호랑이 꼬리를 밟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인 것처럼 인간 환난의 우연성을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우리는 의도치 않는 상황들을 겪고 또 그것들에 대응하는 실천들을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그같은 경험이나 이행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건, 기쁨과 온유로써 강건함에 응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전>은 말한다. 悅而應乎乾. 만약 애꾸눈이나 절름발이처럼 진실을 보지 못하거나 말과 행실의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물리는 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 나아가 강하고 조급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초구효사는, 어떤 현실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망상없이 긍정할 줄 하는, 질박하고도 검소한 삶(素履)의 태도가 무구한 삶의 비결이라고 한다. 설혹 위험하거나 불리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상황을 신중하게 헤아림으로써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해야 길한 유종할 수 있다고 한다(九四 朔朔 終吉). 그러고보면 주역은 참 많은 괘들에서 신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아는 태도를 강조한다. 恐懼修省하는 삶 말이다. 아무리 높고 존귀한 자리에 놓였다 하더라도 자신의 강명함을 믿고 과도하게 밀어붙이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계한다(九五 夬履 貞厲). 그렇게 기쁨과 온유의 힘으로 실천해 나아가면서 그 근원이 되는 삶의 태도(素履)를 돌아볼 줄 안다면 그 자체가 길한 삶이 될 것이라고 한다(視履考祥 其善元吉). 그런데, 이같은 履의 道의 핵심은 '謙'에 있다고(履道尙謙) 공영달은 강조하고 있다. 두 괘가 이렇게 연결될 줄은~~^^
지산겸 괘는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물 아래로 들어가는 謙의 상황 또는 역량을 형상화한 괘다. 이같은 겸괘가 가득 채움을 의미하는 '화천대유' 다음에 배치됐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언가. <주역정의>는 이 謙이 善의 지극한 것임에도 괘사에서 吉을 말하지 않는 까닭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여섯개의 효사들에서 吉과 利를 말하고 있다. 왕필은 "겸괘의 여섯효가 비록 자리를 잃거나 응함이 없거나 剛을 타고 있더라도 모두 흉허물이나 궁색함이 없는 것은 겸손함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겸은 높아도 빛나고 낮아도 넘을수 없다'하니 참으로 그러하다."고 말한다. 謙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의 덕이라는 것이다. 地中有山, 땅 속 또는 아래에 높은 산이 몸을 낮추고 멈춰 있는 형상이다. 뛰어난 덕을 내장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지닌 인간의 면모를 끌어낼 수 있다.
'대상전'에서는 '부다익과 칭물평시(裒多益寡 稱物平施)'의 실천윤리를 말한다. 지나친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채워줌으로써 각 물들의 상황을 헤아려 공평하게 베푼다는 것. 이는 '단전'에서 논하는 천도와 지도, 귀신과 인간의 도와 통한다. 가득한 것(盈)은 언제나 허물어지거나 낮은 것으로 변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기에 귀신은 물론이고 인간 또한 가득하거나 많이 가진 것들을 싫어하고 겸손한 것들에 복을 주거나 좋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겸손함은 단순히 타인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기 위한 처세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기반한 우주 생명적 역량이고, 이를 바탕으로 이끌어낸 통치 윤리가 '부다익과 칭물평시'라 할 수 있겠다. 공영달은 '부다익과'를 '많은 자는 겸손함을 사용하여 모으고 적은 자는 겸손함을 사용하여 보탠다'는 의미, 즉, 겸손할 수만 있다면, 많은 자와 적은 자가 모두 윈-윈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 두 해석의 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겸괘의 아래 세 효는 모두 吉을, 상효 세 개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의 利를 말한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지우거나 낮춤으로써 아래에 머물 수 있는 자는 뭔가를 얻음 없이도 그 자체로 길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반해 위로 올라갈수록 미워할 것과 사랑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과 실천력이 함께 할 수 있어야 겸의 미덕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謙이란, 하괘인 艮의 저지할 수 있는 강인한 힘과 함께 하는 것이지, 타인의 비위나 맞춰주는 순종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이천은 '단전'을 주석하면서 "겸은 낮추고 공손히 하는 것이나 그 도가 尊大하고 光顯하며, 자처하기를 비굴하게 하나 그 덕이 실제로 높아서 더할 수 없으니, 이는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군자가 공손함을 지성으로 하여 항상하고 변치 않는다면 끝마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고 빛나는 것"이라고 그 덕을 예찬한다. 이러니 어디라도 쥐고 다닐만한 덕의 자루가 될 만하지 않나 싶다.
<3주차 (10/22) 공지>
* 오전 읽을 괘 : 수풍정, 화산려입니다. 각 조에서 돌아가면서 발제하시고 주역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겸괘와 리괘는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괘이죠. 겸손의 마음으로 (尙謙)실천하고 밟아나가라는 리괘와 겸손이란 게 소위 영자매 - 虧盈(휴영), 變盈(변영),害盈(해영), 惡盈(오영)의 이치를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라는 정의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근데...후기 이렇게 꼼꼼히 올려주시곤.... 암송이 제일 쉬웠다?!.....깨알 자랑도 잊지 않으셨네요. 암송 신기록 끊은 거 알그든요ㅋㅋㅋㅋ 잘 읽었어요~~ㅋ
p.s. 위에 겸(謙) 한자 오타있어요 ㅍ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