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작이군요.^^ 혹시 불발될까 조마조마했었는데, 무려 여섯 명의 멤버가 모였습니다! 댓글이 달릴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은 마음이 무척 따뜻합니다. 먼저 신청하신 샘들께 제본했던 세르의 <해명>을 미리 나눠드리려 모인 자리에 나타나신(끌려오신) 은이샘, 입춘이 다가오기 직전에 니까야를 읽고 싶다고 댓글을 달아주신 라니샘 모두 격하게 환영합니다! 올 한해도 재밌게, 힘겹게, 또 신나게 공부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줌으로 진행되었던 오티는 한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왜 <디가니까야>와 <욥기>와 미셸 세르를 함께 읽는가?’입니다. 채운샘께서는 ‘번역’에의 실험 혹은 윤리에 대해 말씀해주셨죠. 저희는 어떤 방식으로든 경전을 접했습니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을 들은 사람들, 즉 불제자이지요. 그런 이상 두 가지 책임 혹은 의욕이 떠오릅니다. 첫째는 들은 것을 나의 언어 나의 체험으로 소화해서 내 삶을 깨달음의 길로 이끄는 것이고, 둘째는 첫 번째와 긴밀하게 연관된 것으로 가르침을 나누고 퍼뜨리는 일입니다. 이 두 과정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번역’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혹은 동서고금의 지혜를 지금 내 실존에 적합한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고유한 배치와 접속될 수 있게 변형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번역하고자 하는 애씀’ 없이 우리는 경전을 만날 수도 타자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배움은 고이고 편협해지지요. 종교를 따르는 많은 ‘-교도’들, 즉 추종자 무리와 해석집단 사제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 즉 성인 혹은 붓다가 되기 위해 배웁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가르침을 불교의 전제와 불교의 언어에 국한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읽고 나눠야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이러한 번역과 접속, 소통과 확산의 시도가 저희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출발점으로 돌아갑니다. 불교의 모든 심오한 가르침을 자라나게 했던 근본적 토대로서의 문제의식, 그것은 존재의 ‘고’였습니다. 부처님이 가닿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의 출발점이자, 모든 종교적 지혜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고통이라는 중대한 문제. 통증이나 불쾌감으로 실체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현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행고라는 난해한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정확히는 고대 근동지방) 역시 인과응보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끝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제기해오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 성서의 <욥기>라는 문제적 지혜문학이지요. 이 기이한 텍스트는 실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저희의 지성적 사고가 멈추는 지점까지 데려갑니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심원한 문제제기를 부처님의 고성제와 함께 이해해보면 어떤 사유들이 촉발될지, 결코 평온하지 않을, 그러나 필히 즐거울 이 경전 콜라보가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미셸 세르가 더해지는가! 물론 세르가 불경이나 <욥기>를 직접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종교 해설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만 세르는 탁월한 번역자입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연결의 사유를 배우고 해석의 근육을 키우고자 합니다. 세르는 과학, 철학, 사회학, 문학, 미학, 종교학 등 거의 모든 분야들(종종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을 넘나듭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사유합니다. 일상의 사물들, 날씨나 바람, 감기, 동화 속 인물들 등이 전부 사유의 계기이자 도구입니다. 그러면서 세계를 실체적으로 보는 모든 형이상학을 흩트려 버립니다. 세르는 미규정적 소음, 흐름, 기류, 소용돌이가 세계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개체나 체계는 모두 여기서 현실화되는 소통-전달의 양상들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동일자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걸까, 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듭니다. 이것이 불교와 연관되는 지점인데요. 불교에서 인연조건 혹은 업으로 개념화했던 것과 유사하게, 세르는 존재들의 출현에 있어서 언제나 헤르메스 혹은 천사로 대변되는 소통의 매개자들, 사자들, 전달자들을 개념화합니다. 물론 아주아주 해박하고 폭넓은 영역의 언어들과 이미지들을 활용해서 말이죠. 따라서 읽기는 수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주제로 꿰어지지 않는 답답함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월하지 않기에 함께 읽는 거라는 점, 함께 모이지 않고 또 경전과 접속시키지 않으면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며 반복해서 읽고 그 머리 아픈 과정을 즐겨보면 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아픈 와중에 빛나는 구절들, 생각들이 보이고 옮아오는 경험의 기쁨을 저희가 또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용어와 서술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되죠. 다만 세르가 이것과 저것을, 미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을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것들과 기발하고 발칙하게 엮어내는 방식에는 주목하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라가면서, 무겁게만 생각되던 담론화와 사유의 작업, 즉 번역으로서의 공부의 가벼운 노하우를 배워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번역에의 애씀, 지혜의 헤르메스 되기! 일 년 왁자지껄 공부해보아요!
*첫 시간(2.15) 공지입니다.
1)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 1장과 2장을 꼼꼼히 읽고, 한 쪽 내의 과제를 적어옵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 혹은 질문을 중심으로 적어주셔도 좋고, 불교 혹은 부처님에 대한 의문 또는 새로 품게 된 생각들을 풀어주셔도 좋습니다.
2) 간식은 제가(민호)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3) 후기 또한 간식 담당자가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