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헤르메스 1회 후기 2회 공지
경전의 지혜를 소통시키는 헤르메스-되기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박한 간식을 옆에 두고 첫 시간 공통과제를 돌렸는데요. 글을 써와서 만나니 확실히 기분 좋은 긴장감이 아침을 채우는 것 같습니다. 오전 시간에는 경전을 주제로 세미나 합니다. <디가니까야> 원서로 들어서기 전, 저희는 워밍업을 위해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디가니까야가 아함경이라는 사실!)을 읽고 있습니다. 작은 책이지만 다정한 문체로 초기불교에 대한 소상한 물음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곳곳에서 깊은 감명을 남깁니다. 텍스트가 훌륭해서인지 글을 써와서이진지는 모르겠지만, 저희의 세미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아갔습니다. 오전 세미나의 생각 조각들과 오후 강의 때 들은 미셸 세르의 독특함을 간단히 스케치해보겠습니다.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지나침’
<아함경>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중 하나는 욕망에 대한 질문과 해석이었습니다. 불자이기도 한 저자는 과연 부처님이 욕망을 억누르라고 가르친 것인지 스스로도 깊이 고민했다고 고백하며, 초기 경전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욕망은 무기無記입니다) 갈애, 즉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욕망의 지나치게 사나운 작용’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언뜻 이해된 듯 하다가도 질문이 듭니다. 대체 지나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탐’이라는 수식어, 후유(윤회를 불러옴)를 일으키는 것 등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지 요원합니다. 가령 갈애의 세 분류로서, 성에 관한 욕망(욕애), 개체 존속의 욕망(유애), 명예나 권세에 대한 욕망(무유애)이 제시되는데, 여기서 ‘개체 존속의 욕망’은 뭐가 문제일까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의 권력의지가 떠올라 더 어렵습니다. 이때 ‘유애’는 변화나 노쇠를 부정하고 한결 같은 외모, 재산, 건강을 바라는 영원주의 같은 것일까요?
확실히 욕망에 있어서 공통된 기준을 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도 최소한의 윤리로서 5계(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음주를 금한다)를 제시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배치 속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일례로 주식이나 코인 수익으로 백화점에서 가죽 가방을 플렉스하는 것은 도둑질이나 살생이 아닐까요? 임대료나 지대 수입으로 고액과외를 시켜 명문대에 보내면 ‘정당한 경쟁’인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계를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내가 놓인 배치가 어떤 양상인지를 배워야할 테고요. 이 부단하고 품이 드는 질문과 실험 없이는 욕망의 ‘지나침’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부처님이 항상 강조하신 주문인 “자기 배에 알맞은 분량” 역시도 단지 식탐을 억누르라는 말이 아니라, 수행에 가장 효과적인 먹기를 스스로 세밀하게(때로는 치열하게) 관찰하고 실험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미나 때는 ‘인간은 왜 언제나 욕망을 ‘지나치게’ 일으키고 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역사적 진화적 차원에서의 질문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과하게 탐하는 것은 혹시 생존에 있어서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줘왔던 건 아닐까요? 사실 이상합니다. ‘소화 현상’이 아니라 ‘혀’에서 쾌를 느낀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성욕도 마찬가지죠. 어쩌면 생리적으로 특정 행위를 유도하기 전까지 쾌감의 메커니즘이 진화된 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나눠보았습니다. 그리고 먹는 문제에 있어서 불교는 ‘탁발’이라는 욕망의 훈련과 기예를 세심하게 발전시켜 왔음에 새삼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날 점심은 식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자등명’인데 ‘무아’이기도 하다?
윤순샘의 과제는 쭉쭉 뻗어가는 질문을 일으켰습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과 법, 이 두 가지만을 섬(혹은 등불)로 삼으라는 부처님의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무아’입니다. 나 혹은 자기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를 의지처로 삼는단 말인가! 근본적인 질문이었던 만큼 저희의 집단 지성은 이리저리 나아갔습니다. ‘남’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음을 강조하려는 비유였다는 얘기도 나왔었고요. ‘삼는다’는 말을 능동적으로 해석하여, 자기라는 본질은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 현현하는 이 마음장을 놓치지 말고 직시하면서, 지금 여기를 현위치로 설정하고 법(가르침 받은 연기와 사성제)을 길로 설정하라는 당부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불교의 본질적 가르침인 삼법인은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입니다. ‘무아’는 이미 ‘법’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법’을 의지처로 삼는 한 ‘무아’의 세계를 의지처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과 함께 의지처로 삼는 ‘자기’란 결코 ‘아상’이나 ‘자아’일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려움이 커집니다. 부처님의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주문은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아직 무아로서의 자신을 깨닫지 못한 이들인 셈이죠. 그런데 무아인 자신과 무아라는 진리에 의존하라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난해한 안내 같기도 합니다. 이 감동적이고 자비로운 말씀도 촘촘히 질문해 들어가면 헷갈리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논리로 따지고 들면 구덩이에 빠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말씀을 힘 있게 받아들일 해석과 서사 만들기가 중요할 듯 합니다.
공통과제에서는 고행에 대한 이야기와 악마(마군)에 대한 해석도 재미나게 나왔습니다. 매우 흥미롭고 생각거리도 많으니 지혜와 헤르메스 숙제방을 참고해주세요~
아웃사이더 세르, 오히려 좋아!
첫 주 오후 시간에는 채운샘께서 세르에 대한 간단한 소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번역된 참고자료가 거의 전무한 와중에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시고 손수 교정까지 하셔서 자료를 나눠주셨는데요. 세르의 <자연 계약>(1990)에 관한 짧은 서평이었습니다. 저자는 거기서 세르를 ‘아웃사이더’라고 규정합니다. 세르가 아웃사이더인 이유로는 그가 노동자 가정 출신이라는 것과 당시 학계에서 유행했던 분야를 공부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지만, 핵심은 그의 사유 혹은 연구 방식에 있습니다. 그의 연구는 분류불가능합니다. 문학, 과학, 정치, 수학, 예술, 정보이론 등을 넘나나드는 그의 작업은 일관된 추종자나 제자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특정한 계보나 라인을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전방위성과 다극성은 그가 21세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한 분야만을 파는 전문가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점점 더 접속과 커넥트가 중요해지는 ‘멀티’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이 그렇게 전방위적인 접속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세르는 이런 시대에 가장 걸맞는 인식을 가진 철학자, 모든 지식 영역을 헤르메스처럼 연결하는 ‘판토피안pantopian)입니다. 세르가 직접 사용한 이 명칭은 그동안 진리를 담지한다고 자부해온 철학자와 과학자의 오만을 깨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세르는 축구에서 선수나 팀보다는 공을 사유합니다. 공은 주체는 아니지만 모든 주체들을 움직입니다. 공은 어느 팀에도 속해있지 않고 어떤 의미를 지니지도 않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팀이 훈련하게 하고 선수가 이동하게 하며 경기의 승패라는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이는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돈이나, 입에서 귀로 귀에서 종이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공, 돈, 말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물체이지만 모든 물체들의 움직임과 의미를 촉발시키는 물체입니다. 세르는 이를 ‘유사물체’라고 부릅니다. 세르는 체계의 완결성이 아니라 그것을 교란시키는 가장자리의 유사 존재들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세르는 그런 잠재적인 운동자를 결코 하나의 개념이나 원리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세르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있다면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입니다. 세르의 사유는 소음, 구름, 천사, 교란, 안개, 기식자, 문 등의 개념들로 매번의 역역에서마다 수도 없이 구체화됩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국지적이고 지엽적인 특수함입니다. 총체화하고 일반화하는 사유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인식이 작동하기 위해 언제나 뿌옇게 배경으로 처리된 것, 초점을 맞출 때마다 가려지고 밀려나는 실루엣들, 시야 바깥의 소음들이 세르에게는 중요하고도 유일한 사유 대상입니다. 세르는 대상-배경의 도식을 반전시킵니다. 의식으로부터 누락된 혼잡, 카오스, 소음과 같은 세계가 우리 존재의 기반이며 모든 것이 출현하고 돌아가는 ‘수용력’의 장소입니다. 어떤가요? 마구 흥미가 돋지 않나요? 아직, 그의 텍스트가 가진 매운맛을 보지 못한 저로서는 잠시 그의 매력에 슥 기대고 있으려 합니다.
다음 시간(2.22) 공지입니다.
-<아함경>을 끝까지 읽고, <디가니까야> 해제를 읽고, 공통과제를 씁니다.
-세르 보조 자료와 <해명> 1장을 읽고 질문(2가지 이상?)을 만들어서 과제와 함께 올립니다.
-<해명> 1장 발제는 제가 맡았습니다.
-간식과 후기는 이미영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민호선생님! 불교의 삼법인을 무상, 고, 무아의 순서로 익혀두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선생님의 치열한 공부 속에서 알아내실 수 있으실 거에요.
올해 여정의 시작을 축하드리고 선생님의 불교 공부를 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