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니까야 - 하느님의 그물의 경
이번 주부터 초기 불교 경전 중에서 가장 긴 『디가니까야』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품(계행다발의 품)의 1장 <하느님의 그물의 경>이라는 제목은 경전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붓다가 살던 당시의 모든 견해들을 망라하고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부처님은 그 모두를 62가지 범주로 설명하고 있는데, 과거에 대한 견해와 미래에 대한 견해, 혹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의 두 가지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세계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62가지 견해의 방법 내지 도구는 공통적으로 마음의 삼매의 경험이거나 추론과 탐구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이었던 부처님 또한 이것 외의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을 통찰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견해들은 불교인들에게 사견(邪見)이라 불리우고, 부처님은 이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요?
우선 이 견해들의 원인과 조건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사로잡혀 번민하고 동요한 결과, 자신들에게 감지된 것일 뿐이다.’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을 통해서 잇따라 접촉하면서 그것들을 감지한다.’ 즉 번민하고 동요하는 욕망의 사나운 작용과 그에 수반하는 관계들로 인해 나타난 현상들을 기억하고 지각하고 붙잡아 알게 된 것들을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있다와 없다와 같은 극단으로 갈리게 마련입니다. 부처님은 이것들이 ‘집착된 견해’이기 때문에 그 토대 위에서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필연적이며, 자신은 그것을 분명히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분명한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견해로 규정하거나 정립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견해들의 발생의 조건을 그저 담담하게 밝히고, 앎이라는 사건에 수반되는 느낌에서 거친 위험을 보고, 그 느낌들이 무상하게 사라져 가는 것을 고요하고 차분하게 관찰하며,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존재로 이끄는 통로’라 표현되는 연기의 고리를 끊고 해탈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와 같이 파악되고 이와 같이 집착된 견해의 토대는 이와 같은 운명, 이와 같은 미래로 이끌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여래는 그것을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그 이상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여래는 그 분명히 아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을 여의고 여래는 적멸을 자각한다. 수행승들이여, 느낌들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여래는 집착 없이 해탈한다.(92쪽)
이 경의 전반부에는 부처님과 승가를 비난하는 유행자와 칭찬하는 학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하는 비난에도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저 진실하게 말할 것을 수행자들에게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 칭찬받을 만한 ‘기초적이고 단순한 계행’의 항목들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 행위들의 바탕에 있는 견해들에 대한 분명한 앎이야말로 ‘올바로 칭찬받을 만한’ 수승한 가르침이라고 하시죠.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행위의 밑바탕에 어떤 전제들이 작동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집착된 견해의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 청정한 행위일 때야말로 진정으로 칭찬받을 만하다는 것이고, 비로소 부처님처럼 칭찬도 비난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세르의 시간- 학문 상호 연관성의 문제와 위상기하학적 추상화의 과정
세르는 그 저작의 난해함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철학함의 방법의 요소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사람들은 세르가 방법의 제한을 대충 피하기 위해서 각 영역간을 자유로이 왕래한다고 생각하고, 수학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져 간다고 생각하고, 기술적인 이유에서가 아닌 문학적 욕구에 따른 이유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고 여깁니다.
세르에 대한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그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세르에게 시간이란 없는 것이고 모두가 동시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모든 장르, 작가, 책, 신화들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은 고대의 루크레티우스(『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한물 지나간 기계적인 유물론의 철학으로 간주하지만, 세르는 루크레티우스가 자신의 시대에 이미 실제적으로 유체와 난류와 혼돈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것을 통하여 유사한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우리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루크레티우스를 다시 읽으면서 상호 접근의 기술로써 전통에 동시대성을 되돌려 주며, 시대적으로 단절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분과적으로 단절된 문학과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그에게 시간은 무엇보다 학문 상호 연관성의 문제입니다.
세르의 이런 과감한 상호 접근의 기술은 어떤 관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는 우선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선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이 많은 왜곡을 빚어내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지구를 세상의 중심으로 보았던, 공간에 의해 표현된 허영과 자만이 시간에 투영되고 있는 것으로서 현재가 진보에 의해서 과거를 추월했으며, 언제나 정상, 첨단, 발전의 최고의 완전성에 위치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기존의 과학과 역사의 모든 가설은 시간이 이러한 선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선이나 계획이 아닌 굉장히 복잡한 다양성을 따라서 예기치 않게, 복합적으로 흐릅니다. 역사의 발전은 ‘혼돈의 이론’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닮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문화에 있어서 선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밀접하고, 또 매우 가까운 것 같은 사물들이 실제로는 멀어져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세르가 루크레티우스와 유체에 대한 현대적 이론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르는 시간이 접혀지거나 비틀린다고 말합니다. 마치 장작불 속의 불꽃들의 춤과 비교할 수 있는 다양함입니다. 여기서는 끊어지고, 저기서는 수직적이고, 변화무쌍한 그런 것입니다. 또 그는 시간을 ‘여과의 이론’을 가지고 말하는데, 하나의 여과기를 통해 어떤 흐름은 통과하고 다른 어떤 것은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은 지나가기도 지나가지 않기도 합니다. 시간은 소용돌이치며 혼돈스럽게 흐르고 시간은 여과합니다.
시간을 이렇게 이해하는 그의 전거는 위상기하학입니다. 고전의 미터법적인 기하학이 확정되고 안정된 거리들의 학문인데 반해, 위상기하학은 인접과 찢김들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는 이 위상기하학의 많은 예들을 제시합니다. 다려져 있고 펴져 있는 것이 아닌, 접혀 있고 구겨지고 누더기처럼 되어 있는 손수건의 상태(시간은 이러한 구겨진 변화체를 닮았습니다), 빵 만드는 사람이 반죽을 빚으며 만들어 내는 주름, 베를렌느의 소네트에서 묘사되는 말벌의 미친 여행 등. 그는 이러한 실제적인 시공간을 여행하며 낯선 사물들 사이에서 관계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관계들을 따라가며 근접화하는 조작들을 실행합니다. 이런 자유로운 조작을 위해 세르는 ‘헤르메스’를 새롭게 소환해 냅니다. 헤르메스는 동사나 실사가 아닌 전치사(preposition)의 관계들을 따라 모든 주장-입장(position)-에 앞선 실제적인 시공간의 항해도를 창조합니다. 세르는 직관에서 출발해서 수학적 엄밀함의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체계적이고 견고한 단편이 아닌 ‘연약한 종합’으로 나아가는데, 세르에게 있어서 종합적인 요소는 관계의 양식뿐만 아니라, 이 관계의 양식이 잠재적으로 또는 가시적으로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방식까지를 아우릅니다.
차분하고 알찬 후기 감사합니다. 붓다의 집착된 견해의 토대가 아닌 전거가 무엇인가를 묻는 순간 우리는 그 전거를 파악하고, 그 전거를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겠다는 다짐(열심)을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방향성에서 1도라도 다른 각도로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세르의 견고한 단편을 향한 탐구가 아닌 연약한 종합을 생성하는 탐구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세미나 오전/오후의 책 모두 우리에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공지 : <디가니까야>1품 2,3장 읽고, 공통과제
<해명> 4,5장 읽고, 질문 3개
숙제방에 공통과제와 함께 질문을 올려 주세요.
<해명> 발제는 은이샘, 미영샘
간식과 후기는 라니샘 입니다.
목요일에 보아요~
칭찬과 비난, 견해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붓다
학제간의 구분이나 실체적 개념에 걸리지 않고 빠르게 이동하는 세르
62가지 사견들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이 놓인 근거들을 내보이는 동시에, 견해 발생에 관한 연기적 설명을 붙여주는 붓다
지엽적인 문제들에 대해 매번 새로운 열쇠를 만들면서 열쇠 꾸러미를 늘려가는 한편, 헤르메스로부터 종합에의 의지를 보이는 세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연결성이 느껴지는 건, 저의 오해 때문일까요, 시간이 굽어 있기 때문일까요?
오전과 오후, 공들여 읽어온 텍스트가 아깝지 않게, 풍성한 이야기를 꼼꼼하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더 꼼꼼히 읽고 정리해가고 싶다는 마음이 솟네요 ㅎㅎ
후기와 공지 잘 읽었습니다!
오전 오후를 모두 함께 이끌고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텍스트와 학우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져서 올 한 해 가 기대?되기도 하구요.
시간에 대한 개념을 지난주 세르의 방식으로 따라가보니 두 텍스트를 연결해야된다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구요.
시간 ...우리가 공부함에 있어 계속 생각해봐야 하는 주제일 거 같습니다.
은이샘 지난주 강의 잔잔이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하구요.좀 있다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