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디가니까야 세미나
우리는 마음 속에 각자 고민을 안고 산다. 잊기 위해 맛있는 걸로 입과 배를 채우기도 하고 눈 앞의 드라마에 정신이 팔리기도 한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고요한 순간을 맞이하면 괴로움을 홀로 감당하며 잠 못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한 <디가니까야> 두 번째 경에도 잠 못 이루다 붓다가 있는 숲으로 행차한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전능한 그가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뛰어난 수행자라면 해결해주지 않을까하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
붓다를 만난 왕은 확인할 길 없는 사후의 복 같은 것 말고 현세에서 눈에 보이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는다. 붓다는 그에게 맞는 대기설법을 하기 위해 오히려 그에게 질문한다.
"만약 매일같이 당신 안색을 살피고 당신을 위해 일하던 하인이, 출가해서는 적당한 의식주에 만족하며 여읨을 즐기며 지낸다고 듣는다면 다시 데려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인의 삶보다 출가자의 삶이 더 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마 그를 다시 데려오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인일 때 그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수행자의 삶을 살 때는 존중의 시선으로 바뀜을 느꼈다. 하인에 이어 자신에게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던 부농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받자 역시나 자신의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다.
그런데 붓다의 이 질문이 일반적인 수행자가 되어 사는 삶의 결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자따쌋뚜 왕 개인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지 세미나 중 논쟁이 있었다. 한마디로 어느 한 쪽을 목표로 했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이 질문을 통해 왕 개인이 늘 자기 아래로 보던 이들에 대한 시선이 바뀌는 것을 그의 대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또한 제 삼자인 일반 대중에게도 하인과 부농의 삶보다는 출가해서 계급적 편견을 받지 않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주는 설법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설법은 왕 개인의 변화를 꾀하는 형식이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향해있는 일반적인 내용이기도 한다. 국소적 변화로 일반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미셸 세르의 화법과도 닿아있다고 할까?
어쨌거나 왕은 붓다에게 앞서 말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결실이 있는지 또 묻는다. 그러자 붓다는 계율을 지키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면 선정에 들어 삼매에 이를 수 있고, 지혜와 덕을 갖출 수 있음을 상세히 이야기해준다. 이 말씀 중에 감각적 욕망과 쾌락을 ‘빚’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어 세미나중에 토론을 하게 되었다. 왜 빚이라고 하셨을까에 대한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빚이라는 걸 알게 되면 감각적 쾌락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주저하게 된다고 결론 내렸다.
왕은 붓다의 말을 듣고는 감화되어 불법승에 귀의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과거 아버지인 왕을 해치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을 고백하며 고통의 이유를 밝히기도 한다. 하지만 출가하지는 않았다. 할 일이 많아 바쁘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여기서 세미나에 참여한 우리는 여기에서 얼핏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감화를 기다리는 나. 그러나 살던 대로 살겠다는 나. 우리는 닮고 싶은 사람의 외면만 보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떤 내면적 고난과 성숙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잘 보지 못한다. ‘나’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 원인인 탐진치까지 보게 되면서 나만의 동력을 찾아야 한다.
사실 수행자의 삶의 뛰어난 결실에 대한 부분은 경마다 계속 반복되고 있다. 기록의 매체가 없던 시대에는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한 이 경을 매주 반복해서 읽는 우리가 어느샌가 수행자의 삶을 닮아있기를 기대해본다.
2교시 미셸 세르 세미나는 고통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오래된 필연성(p.297)’에 의해 생로병사를 받아들여왔던 과거에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으나 지금의 고통은 어떤 상태인가? 기술과 과학에 의해 인류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알려진 지금, 필연성에 대항한 동일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선한 계획들이 때때로 예기치 못하게 불행한 결과가 되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일이 ‘할 수 있다’는 발표가 있자마자 ‘해야 한다’로 여겨지고 빠른 속도로 ‘한다’로 현실화된다. 자연의 결과에다 문명과 기술의 결과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요즘은 붓다를 이루기 위해서는 출가로 안 끝날 것 같다. 달라이 라마가 BBC 뉴스를 보는 세상이다. 개인에게 메가톤급 도덕이 요구된다.
분리는 반우주적
바알은 희생 제의를 뜻하지만 사실 제의를 주관하는 이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챌린저호도 과학적 유용성을 가진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바알처럼 제의적이고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p.247).
반대로 JUPITER라는 단어에는 의미가 합쳐져 드러나 있다(p.261). 옛날에는 항들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JU(태양, 하늘)는 과학에 의해 씻겨나가고 더이상 신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PITER(아버지, 부계) 역시 인문 과학에 의해 비판되고 추방되었다. 세르는 따로 따로 분리하는 것은 반우주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근사대상을 추구한다. 그 사이에 헤르메스가 존재하여 연결한다. 자신의 책들이 그 예이다.
인간성에 대한 요구
윤리에게는 두 개의 빛의 근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하나의 빛, 과학으로부터의 빛만 나오고 있다. 다른 하나의 빛인 ‘우리’라는 것을 탐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에 인문과학이 필요하다(p.307). 두 개의 빛이 상호 간섭하는 지역에서 최선의 빛을 얻는다.
그런데 게임은 둘이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셋이 벌인다(p.309). ‘오랜 악의 문제’, 인간적 고통, 슬픔, 울음의 ‘밑바탕의 소음’들이 제3자이며 기저에 흐르고 있다. 지식의 기원은 우리가 알고있듯 오감을 통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고통받고 죽음을 예감하는 것에서 온다. 우리의 능력은 우리의 약점에서 오고, 우리의 효율성은 우리의 허약함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제 피고석에 세울 악이 너무 많다. 고발의 시대는 마감했다. 악은 하나의 존재에서 오기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p.329). 그래서 관계들의 도덕이 필요하다. 최선의 치료는 암세포를 색출하고 없애는 것보다 암세포의 생명력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p.332).
그래서 세미나를 하고 있는 우리는 세르 공부를 바탕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허약한’ 자들(팔레스타인)에게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들 편에 선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적어보기로 하며 오늘의 세미나를 마쳤다.
**공지 사항**
<디가니까야> 4, 5장
<천사들의 전설> p.83 까지 읽어오기
꼼꼼히 적어주신 후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방대한 텍스트만큼이나 너무 많은 이야기가 오가서 정리하시느라 애쓰셨을 것 같습니다!
<디가니까야 > 경전에 나온 이야기들을 상징들로서 하나하나 함께 풀어가는 작업이 어렵지만 신나고 재미난 것 같습니다.
샘의 후기 중간에 국소적 변화로 전체적 변화를 야기한다는 세르의 화법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듣고 싶긴 합니다!
지금까지는 대담이어서, 그리고 라투르가 아주 열성을 다해 가이드를 해줘서 맥락이 조금이라도 잡혔는데요.
본격적으로 세르의 책으로 들어가서 맥락을 잡는다는 것이 역시 만만치 않은 듯 합니다! 그래도 좌충우돌 읽어가보아요~
세르가 경계했던 논쟁 아닌 논쟁으로 지난주 후끈했죠ㅎ
예상외로 디가니까야가 울림이 있어 할 얘기가 풍성해서 좋았습니다. 텍스트를 만나기 전에 세르라는 인물을 먼저 탐구하게 되어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물론 텍스트를 만나면 또 낯설겠죠. 우리 같이 열심히 헤매어 봐요.
규문 와서 첫 후기 고생하셨습니다 라니샘^^
탐욕을 '빚'으로, 분노를 '질병' 등으로 비유하는 것이 재미있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부처님 당시와 지금이 동시대적인 느낌이 드네요.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해 펼치는 설법을 통한 자비심도 느껴지구요. 라니샘 말대로 이 경을 반복해서 접할 수 있는 우리가 수행자의 삶에 한 뼘이라도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꼼꼼한 후기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