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학기도 벌써 4번째 주가 지났습니다. 시작하니 시간은 잘도 흘러갑니다. 이번 해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공부를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첨에는 세르라는 저자도 낯설고, 6명의 소규모 인원에, 오전 오후를 온리 우리 목소리로만 꽉꽉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근데 기우였습니다. 오디오가 안 비네요. 새로 오신 라니샘에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정신차리면 시간이 모잘라 점심 먹어달라는 전령에게 독촉을 받기 일쑤입니다. 오후시간도 1시간 오바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쉽습니다. 못 다한 얘기를 뒷풀이에 가서 늘어놓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공부의 마지막에 저희가 어떤 다른 느낌으로 각자 본인을 맞이할지 살짝 기대되기도 합니다.
오전 시간에는 디가니까야를 읽고 함께 토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경을 처음 읽는데 예상은 했지만 반복 구절이 많더라구요. 처음엔 열심히 읽다가도 읽던 게 또 나오면 스킵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근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니 전에 안 보이던 게 보이면서 감동이 생깁니다. 경이 주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는 쏘나단다와 꾸따단따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매 장마다 대기설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번 주는 이 두 사람의 질문과 부처님의 응답으로 얽힌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토론한 주제를 중심으로 후기 적어봅니다.
재산과 명성
쏘나단다는 사념, 잡생각이 많은 인물입니다. 부처에게 질문을 잘못하면 어쩌지, 부처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면 어쩌지. 그러면 대중들이 자신을 경멸하면 어쩌지. 지금 공부하는 저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런 속내를 보입니다. 대중이 경멸하면 “명성도 떨어진다. 명성이 떨어지면 재산도 감소할 것이다. 우리의 재산은 실로 명성에 의해 얻어진다.” 이 사람에게 궁극에는 뭣이 중할까요. 사람마다 시대마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변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명예욕과 재물욕은 가장 우릴 번다하게 합니다. 쏘나단다는 바라문으로 계급 1순위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바라문에게는 대중의 눈이 두렵습니다. 명성으로 먹고 살기 때문이죠. 재물은 자연스레 뒤따라옵니다. 이들은 가오가 중하고 명성에 의존해 살기 때문에 재물보다는 명예에 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재물을 직접적으로 탐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다면 명성이, 그들의 가오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반문해봅니다. 만약 극으로 몰릴 경우 그들은 가오와 재물, 둘 중 어떤 걸 선택할까요. 인간 본성까지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 둘은 서로 맞물려 분리될 수밖에 없지만, 뭣이 이들에겐 중할까 라는 각자의 결이 다른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부처님은 질문하러 오는 이들에게 이렇게 환영인사를 합니다. 이 평범한 한마디가 어떤 의미일까요. 이 경에서는 부처님의 포교방식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온 이에게, 절실한 질문거리를 가지고 온 이에게 부처님은 그 이상을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찾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고 만족하게끔 완벽한 설교를 꾀합니다. 쏘나단다의 불안한 마음을 꿰뚫고 그를 안정시키고 그에 대한 답과 더불어 그 사람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자기에게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상대를 안정시키는 이 한마디...잘 오셨습니다. 온 것만으로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은 부처님이, 법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발짝 움직이는 게 정말 어렵고 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쏘나단다 vs 꾸따단따
쏘나단다는 질문이 딱히 없습니다. 질문의 내용보다는 질문을 하는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입니다. 쏘나단다는 자의식이 강해서 생각이 많습니다. 남들 이목도 중허고 지키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질문 하나 하러 가는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저는 저를 보는 듯 싶었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질문하나 하기가 어찌나 낯 뜨거운지.
반면 꾸따단따는 절실한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왕의 만족을 위해 제사를 주관하지만, 세속적인 제사가 아닌 궁극의 제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죠. 그는 부처님의 덕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본인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요건에 대해 질문합니다. 물론 부처님 대답은 제사를 넘어 보시를, 보시를 넘어 보다 확장된 ‘나에게로 이르는 길’에 대해 얘기합니다.
제사 vs 보시
꾸따단따의 질문은 ‘제대로’ 제사드리는 법입니다. 꾸따단따는 당시 바라문이면서 왕의 제사를 주관하는 높은 바라문 제사장입니다. 제사의 방법과 형식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근데도 부처님에게 보이는 덕성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직업정신에 의거 자신의 궁금증을 가지고 방문합니다. 당시 부처님 생전 인도는 상업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해지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제사의 허례허식이 만연했을 것입니다. 초기의 소박한 제례의식은 사라지고 제사는 화려해지고 사치해졌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제사에 따른 재정낭비와 인력의 희생이 당연시되었고, 서민들에게 온갖 부담이 지어졌을 것입니다. 중앙으로 왕의 권력이 쏠림으로써 지방권력층의 불만도 커졌을 것입니다. 당시 제사는 이처럼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서 누군가의 피와 땀이 누수되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부처님은 이처럼 제사 본연의 의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 생각지 못한 곳까지 살펴야 함을 당부합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아주 세세하게 잘 헤아려야 하는 거죠.
꾸따단따는 이에 질문을 이어갑니다. 이것보다 더 가성비 좋은 제사가 뭐지요? 덜 번거롭고 더 효과적인. 부처님은 승단에 보시를 언급합니다. 뜬금없이 제사에서 보시로 선회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출가자가 모인 승단에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말한 효과적인 제사라고 말입니다. 우문현답이 이런 것일까요. 본인의 자질을 잘 갖추어 제사에 임해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에 조금 편하게 하는 제사를 여쭤보니 계행을 지키는 출가자에게 보시하라는 답을 주십니다. 앞에 설한 제사 노하우가 번거롭다면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승단에 보시하면 그들이 대신 제사를 치러주는 것과 같다 라는 이치입니다, 근데 여기서 꾸따단따...멈추질 않습니다. 승단 보시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더 효과적인 제사를 묻습니다. 부처님 답은 계정혜 보시...“착하고 건전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갖추고, 청정한 삶을 추구하고 계행을 구족하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의 분량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어 만족하게 지냅니다” 그러면서 디가니까야의 반복구절 “계행의 다발”을 설법하십니다. 나 하나 갈고 닦아 깨닫는 게 제사이며 보시인 것입니다. 형식을 갖춘 왕의 제사에서 나로 돌아온 것이 어찌 보면 축소된 거 같지만...무한하게 확장된 정말 어려운 실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비폭력과 아힘사(不害)
저희는 오후에 공부하는 세르와 디가니까야를 연결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전쟁에 비추어서도요. 프랑스 철학자 세르는 폭력을 무지 싫어합니다. 부처님도 물론이시겠지요. 나의 행이 누군가에겐 폭력으로 전해질 것이 분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를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조목조목 따지면 진짜 사는 게 폭력입니다. 제사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기쁨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 전제를 깔고 있죠. 부처님에게 질문한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의 함의를 깨닫고 귀의합니다. 재가자도 있지만 출가한 사람이 대부분이구요. 우리는 출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진정한 보시
보시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의 현실, 후원에 대해 고민해봤습니다. 자신이 후원하는 단체가 문제의 단체임이 드러나 후원을 끊었던 경험, 이에 찜찜함과 자기 반성의 사례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후원함에 있어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할까요. 왜 일상소비는 별 생각 없이 저지르면서 자기가 후원하는 돈은 잘 쓰여지기를 감시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원초적 이기심일까요. 기부에 의미를 두는 것이 꼭 나쁜 걸까요.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기부가 잘 쓰여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하지 않으까요. 그럼 무주상보시가 정답?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답을 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부하기 전 후원단체를 물색함에 있어 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제가 속물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땐 남들한테 적당한 후원단체를 물어 기부하고 싶더라구요. 어찌 보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기부 단체에 숟가락을 얻는 게으름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날 탓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보시하겠다는 마음, 누군가와 함께 가겠다는 마음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오후시간에는 세르와 관련된 두 번째 텍스트,『천사들의 전설』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세르의 텍스트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본인 입으로 본인을 해명해 준 『해명』이라는 텍스트를 먼저 접해서인지 천사들의 전설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습니다.
세르의 문제의식
보통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세르 역시 현재의 진단과 미래의 예측에서 문제점을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근데 세르의 독특한 지점이 발견됩니다. 과학과 기술의 지나친 발전으로 우리는 오히려 재앙과 재난의 역풍을 맞이하게 되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세르처럼 지금 현재를 긍정하는 평화의 철학자가 있을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으로 일군 지금 현재 쾌락의 누림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도 우리가 아직까지 사용하는 사물”들로부터 비롯된다고 합니다. 더 이상 효력이 사라진 것을 종교처럼 전쟁처럼 사회 전체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문제라는 거죠. 예를 들면 노동입니다. 그런 옛날식 작업은 오염을 초래하고 실업의 역효과를 초래하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압니다. 생산과잉에 먹을 건 넘쳐나고 어딘가가 문제이고 부족한지를요. 결국 분배의 문제입니다. 근데도 우리는 외면합니다. 어쩌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통합하기보다는 분리하기에 급급한 근대 분과학문에서 비롯된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내 한자리, 나만 생각하게 만드는 좁은 눈을 만든 건 우리니까요. 우리의 “재앙과 고난은 현재를 너무 뒤늦게 이해해서 비롯되는 것”인 겁니다. 저는 여기서 생각의 습관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은 이미 다른 곳에 있는데 인식은 전 단계를 답습하는 거죠. 이미 정보화시대에 접어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주체이면서 그 모든 업보를 다같이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온실가스는 더 이상 국지적인 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까요. 세르는 계속 우리가 구시대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지금의 과학 기술발달 단계를 긍정하고 앞으로의 삶의 형태에 알맞은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누구는 유토피아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현재는 어찌보면 기적같은 선물이기도 합니다.
극빈자, 가브리엘, 대천사
뜬금없이 왠 천사?인가 싶은데 세르가 얘기하는 천사는 무척 다양한 은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메시지들이며 그들의 육신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주고 받는 모든 것에서 세르는 천사들을 볼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 속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거죠. 단지 우리는 전달자, 중재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세르는 인간 뿐 아니라 사물 전체 모든 것을 주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대로 내비두면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천사는 머물지 않고 이동해야 합니다. 단지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분배하고 취합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천사는 눈에 보이는 사물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람, 빛 물결 속에도 천사들은 있습니다. 이 흐름들은 “아주 완벽한 혼합이나 반죽을 만들어 내어” 우리에게 코드화된 메시지들을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 코드를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대천사가 등장합니다. 공항에 나타난 극빈자가 숨을 거둘 때 공항진료소 의사인 피아는 분명 그가 가브리엘임을 확신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 그는 동정마리아에게 예수를 곧 임신하리라고 예언하는 수태고지의 인물입니다. 말씀이 육화된 완벽한 메세지입닌다. 이성적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예수의 탄생으로 세상은 결정적으로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죠. 루크레우스에게 영감을 많이 받은 세르는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에서 이 대천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인과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 생명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의지이면서 메시지 그 자체인 거죠. 세르는 수태고지의 순간처럼 극빈자에게서 완벽한 메시지, 대천사를 봅니다. 생산이 넘쳐나고 소비에 목 매는 시대에 우리는 극빈자를 낙오자, 게으른자로 치부하지만 이들의 삶과 죽음에서 우리는 그들과 전체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맞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카오스와 혼란을 스스로 일으키며 살아가는 천사이지만, 우리 위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대천사, 극빈자, 가브리엘에 의해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가역적시간, 불가역적시간, 부負엔트로피의 시간
세르는 과거로부터 지금 사회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옛날식 운반, 즉 움직이지 않는 형태들의 떠받치기, 이는 헤라클레스의 시대로 비유합니다. 말하자면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시대입니다. 그다음 시대는 변형의 시대입니다. 산업혁명에 즈음하여 우리는 사물들을 변형시켜 기계화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이 시대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 즉 통신, 간섭, 전달, 번역, 분배..전달과 메시지의 시대, 천사들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천사이면서 메시지를 전달합니니다. 헤라클레스-프로메테우스 -천사들은 각각 골격- 물질대사-신경계로 비유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골격, 물질대사, 신경계 세 가지를 합치면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로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통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관념적,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가역적 시간과 불에서 비롯된 열역학의 불가역적인 시간, 이에 덧붙여 수태고지의 특이점을 낳는 이른바 부엔트로피의 시간을 모두 통합해야만 우리는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물질의 세 가지 상태일 뿐입니다. 시간은 예전에 우리가 생각한 방식으로 절대 흐르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도시
이렇게 천사들이 메시지를 끊임없이 빠르게 이동하며 전달하는 천사들의 도시는 신-도시이며 세계-도시입니다. 이제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도시가 됩니다. 단 하나의 띠를 중심으로 조직되는데, 매우 다양한 매체와 연결되는 선택의 여지가 풍부한 길입니다. 이는 간선로, 즉 모든 길이 연결되어 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선택의 결과에 모두 자유롭지 못합니다. 단 하나의 띠로 연결되어 있기에 영향의 양상은 다를지언정 모두가 그 업보를 받게 됩니다. 우연히 영상에서 초코렛 생산과정의 비하인드를 알게 되었는데, 내 입에 달콤한 초코렛이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어린 아이들의 피,땀,눈물로 범벅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번 세미나 이후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려 노력하는 세르에게 천사들의 도시가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노동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자유로워진 몸으로 “감각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낙원의 시간을 꿈꾸는 일”입니다. 지식, 문화, 보살핌, 예술, 대화...천사들의 삶을 대표하는 표현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로서 평생교육이 실시되고, 직업을 갖는 일이 드물어지고, 개방대학이 생겨나며, 원격학습이 캠퍼스를 대신하게 됩니다. 평생 놀며 공부하는 게 일이 되는 시대를 세르는 예언합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예전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낡은 것들에 매달리는데 이것이 큰 재앙과 고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토론한 걸 어떻게든 소화해서 정리하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담주는 「디가니까야」 ‘마할리의 경’과 ‘잘리야의 경’을 읽고 공통과제, 그리고「천사들의 전설」은 처음 발제를 맡은 민호샘을 제외하고 각자 맡은 장을 발제하고 질문 3가지씩 올려주시면 됩니다.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첫머리에 언급하신 '이 공부를 잘 선택했다'라는 마음이 커지는 느낌을 주는 후기네요. 남들이 훌륭한 텍스트라 권해도 우리가 접속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지요. 텍스트와 나와 우리 그리고 이 시공간과 함께 생산하는 세미나, 이 보다 좋은 공부 활동을 상상하긴 어렵네요. 샘 후기에서 저는 우리가 나눈 현장이 들어 올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세미나의 열의와 즐거움이 뿜뿜 느껴집니다~ 아, 이렇게 한 텍스트를 꼼꼼하고 밀도 높게 만나니 행복하군요 ㅎㅎ 샘들과 머리 맞대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웃고 떠드는 덕에 디가니까야도, 세르도 읽는 맛이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