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헤르메스’ 세미나가 진행되는 목요일은 묵직함과 설렘이 함께 있습니다. 오전에는 불경을, 오후에는 세르의 책을 이야기하는데요. 둘 모두 꼼꼼히 따라가기 위해 과제와 미니 발제를 준비해오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혼자 읽을 때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너무 당연하지만!) 안심이 됩니다. 세미나 때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추고 실을 엮어갈 수 있음을 이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로 정리되지도 뾰족하게 결론 나지도 않지만 모임의 효과는 엄청납니다. 이전까지 1에 그쳤던 이해도가 세미나에서는 6을 넘어 9, 10까지 뿌리를 뻗쳐 갑니다. 이번 주에는 은이샘의 아드님이 깜짝 방문하셔서, 집에서 보이던 특이한 책 <디가니까야>가 여섯 권이 놓인 걸 보고 놀라셨다고 하셨는데요. 잘해봐야 그 아파트 단지(혹은 지역구)에 한두 권 있을 책들이 목요일에는 한 장소에 모이곤 합니다. 일주일 동안 더듬더듬 이뤄진 텍스트와의 국지적 소통이 모여서 메시지의 이동량이 확 늘어나는 세미나 자리는 세르의 표현으로 하자면 ‘입체교차로’라 할 수 있겠네요. 재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전 <디가니까야> : ‘지각’을 둘러싼 물음들
9장 ‘뽓따빠다의 경’은 길이도 길고 플롯도 하나가 아니어서 저희에게 많은 의문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억에 남는 논의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왜 뽓따빠다는 재가 신자에 그치고 찟따는 출가했을까?’ 부처님의 논의가 정리되면 대부분 귀의를 하는데, 그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결과론적 접근이지만 저희는 뽓따빠다와 찟따의 배경적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뽓따빠다는 이교도의 스승으로서, 당시의 여러 유행자들과 방대한 지적 논의를 벌여온 자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부처님과의 문답에 이끌려가면서도 스스로를 ‘식견이 있는 자’로 규정합니다. 논의는 약간 평행선을 그리는 듯 이어지지요. 반면 찟따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로서 부처님의 문답에 세세히 응답하며 따라갑니다. 저희는 ‘코끼리 조련’이라는 배경이 찟따에게 마음을 조련하는 훈련인가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2) ‘지각은 무엇이며, 지각의 소멸이란 뭘까?’ 뽓따빠다의 질문은, 이교 수행자들의 화제였던 ‘지각이 어떻게 소멸하는가’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각’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막혔습니다. 이는 오온의 세 번째인 인지 작용(想, sanna)일까요? 아니면 선정에서의 지각(jhanasanna)일까요? 경전에서는 지각과 앎을 구분해서 쓰는 걸 보니 지각은 감각적 느낌(受)도 아니고 의식적 앎(識)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화합 작용인 것 같습니다. <구사론>에서 배웠던 근-경-식의 마주침(觸)으로서 형성되는 일차적인 상이 떠오릅니다. 어쨌든 부처님은 그러한 지각이 네 가지 선정을 넘어 무색계의 ‘무소유처’(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정점을 이루고 이후 ‘비상비비상처’(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 이후에 소멸된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지각이 점점 순차적으로 미세해져 가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대체 이게 어떤 사건인지는 도통 그려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저희는 현생에서 몸을 가진 유여열반의 상태에서는 오온이 남아 있기에 지각도 있어야 하지 않나,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눴으나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주석 563에 보면, 지각과 느낌의 소멸은 MN.43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하는데, 이 약어가 어떤 경전인지를 모르겠네요...)
4) ‘지각이 앎보다 먼저 생겨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뽓따빠다는 지각과 앎 중 무엇이 먼저 생겨나냐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지각이 먼저 생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좀 의미심장한데요. 저희는 이로부터 어떤 경지 혹은 성취에 대한 개념적 이해는 그러한 존재가 직접 되어가는 과정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도 읽었습니다. 이론적 앎이 아니라 현행적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 이는 부처님이 세계의 영원성과 유한성,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 여래의 사후 존재 여부 등의 질문들에 침묵으로 응한 점과 연관되는 듯합니다. 이런 원리적 질문은 깨달음과 무관하며 해탈에 전혀 유익하지 않지요. 오로지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고를 문제 삼는 사성제의 질문들입니다. 우주의 본질이든 자아의 본질이든, 그것을 겪지 않고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말씀 같습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거기에 가까워지는 길에 들어서지 않은 채 그곳 풍경이 어떠한지를 묻는 이에게 유익하지도 알려질 수도 없다는 것 같습니다. 지각이 먼저다. 이는 신체의 접속과 배치를 바꾸는 사건, 즉 감관을 수호하고 지각을 미세하게 하는 계행의 훈련이 앎도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읽힙니다. 앎이 먼저냐 지각이 먼저냐. 저희는 이를 두고 봄과 앎의 동시적 통찰, 계-정-혜의 단계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각과 앎은 순차성의 문제가 아니라 두 층위의 동시성 및 의존관계의 문제 같기도 합니다.
4)‘외도들의 형이상학적 질문은 불변적 자아에 대한 집착인가?’ 지각과 앎의 논의는 자연스레 ‘자아’의 문제와 연관됩니다. 뽓따빠다는 자아가 지각과 같은 것인지, 물질 없이도 이루어지는지를 묻습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서 어떤 실체가 전제되고 있음을, 즉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극단으로 치우치는 ‘이교적 경향’을 간파합니다. 그리하여 확정적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데요. 그러면서 ‘자아는 오로지 행복한 것이고, 죽은 후에는 질병을 여읜다’라는 이교의 견해를 파헤칩니다. 그들은 ‘오로지 행복한 자아’라는 볼 수도 없고, 단 한나절도 체험할 수도 없고, 거기에 가는 길도 모르는 문제들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이들의 질문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자아의 안위와 거취에 대해서만 신경 쓰는 것 아닌지 저희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카스트의 위계 속 바라문들이 현세의 행복을 연장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거나 고행하는 유행자들이 현생의 비루한 처지가 극복된 내세를 꿈꾸는 희망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선정의 단계에 따라 ‘미세한 실재에 대한 지각’이 생겨나면, 그렇게 ‘미세한 실재에 대해서 지각하는 자’가 있게 된다는 구절에서, 자아란 그때그때 설립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5) ‘그렇다면 그저 부처님이 제시하는 길대로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는가?’ 잡담부터 형이상학까지 수많은 견해들이 무용한 것이라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오직 출가와 계행 뿐인가? <디가니까야>의 장들은 때때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앞에 묘한 무력감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경전의 논리는 촘촘하고 엄격합니다.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어 보이죠. 하지만 이런 감정은 우리 안에서 불교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내 삶에 유용하게 가져오고 싶은 바람에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초기불경의 엄정함은 부처님 열반 이후 설법의 곡해와 와전을 걱정해 결집했던 제자들의 깊은 우려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시간 속에서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변전을 계속 겪으며 퍼져나갔죠. 그렇기에 접속과 재구성의 과정은 열려 있습니다. 경전을 리좀적으로 읽고 천사적으로 번역하는 일은 저희에게 늘 열려 있을 것입니다. 매주 저희의 세미나에서 확인되듯, 좀처럼 요약과 합의를 허용하지 않는 텍스트인 불경은 그만큼 해석과 변주의 가능성도 큰 것 같습니다.
오후 :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일 뿐”
<천사들의 전설>의 후반부에 들어섰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천사와 수호천사가 다뤄졌다면 이번에는 지품천사, 치품천사, 지배의 천사들(능품천사, 좌품천사, 주천사)이 다뤄지고, 악마 그리고 자비의 이야기까지가 다뤄집니다. 챕터별로 꼼꼼히 발제를 하고 구석구석 질문들을 풀어가길 시도했던 덕에 머릿속에 망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천사들의 날개가 퍼덕거리는 느낌적인 느낌? 꼼꼼한 발제 퍼즐들은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참고해 주시고, 여기서는 기억에 남는 조각들만 적어보겠습니다.
1)지품천사 : 반인반수의 교육자-입체교차로가 일으키는 ‘-되기’의 사건
“단순한 천사-메신저가 하는 것인 정점定點들 사이의 연결뿐 아니라, 망들 사이를 연결해서 일반적인 메시지 전달체계가 구축될 수 있지.”
“그러니까 분류의 관점에서 지품천사는 더 높은 차원을 나타내.”(176쪽)
천사들의 등급에서 이인자인 지품천사는 위상들을 겹칩니다. 클로버 모양의 입체교차로에서 도로망이 연결되듯, 혹은 공항에 의해 두 대륙이 연결되듯, 이질성을 이룬 체계들이 접속하는 사건의 담당자가 지품천사입니다. 반인반수 혹은 반신반인의 형상은 신화 속에서 교육자로 등장하거나(켄타우로스) 다른 세계의 안내자(케룹)로 조각되어 신전 입구를 지킵니다. 이중성의 존재인 지품천사가 다른 천사와 구분되는 지점은 소통의 입체성 혹은 전면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전, 입양, 멀티 플러그, 반도체, 시냅스, 공항 등이 그 대표적 예인데요. 이런 접속은 단지 고정점들 사이의 연결이 아닌 망들 사이의 연결입니다. 미시적이고 항시적인 소통 너머의 패치와 패치 혹은 종과 종 간의 질적 마주침인 것이죠. 그 섞임의 효과는 강렬해 황홀한 경이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항시 교육적 효과를 낳습니다. 왤까요? 저희는 이를 들뢰즈의 ‘-되기’ 개념과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되기는 언제나 소수자-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자기도 아니고 대상도 아닌 기이한 무엇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품천사의 사랑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181쪽)
2)천사와 짐승 : 신을 만드는 기계를 정지시켜라, 그러나...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우리는 우리 모두 그저 인간일 뿐임을 깨달을까? 네가 바로 그러하다면, 너 자신을 더 이상 죽일 필요가 없어지니 정말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신들을 만들어내는 이 기계가 멈출 때,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189쪽)
세르는 반전 규칙에 대해 말합니다. 악마를 죽이고 있는 대천사는 악마와 구분이 가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차면 반드시 기우는 음양 같은 것일까요? 세르는 순차성보다도 동시성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선악을 오른쪽을 들어 올리는 천칭의 정의는, 왼쪽의 내리누르는 무력을 전제합니다. 올바름의 상태는 언제나 선-과보, 악-처벌의 방식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신적인 것이 있으면 언제나 짐승적인 것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는 천칭의 가로장이 곧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불의를 생산함으로써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오래도록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신으로 보거나 짐승으로 봅니다. 결과는, 찬탄하거나 검열하거나, 신격화하거나 학살하거나. 끊임없이 삐걱이며 저울의 심판이 이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와 홉스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우리는 서로를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들며 저울의 위나 아래로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 즉 복음은 신을 만드는 동시에 짐승을 만드는 기계를 정지시키는 것, 천사의 지배를 종언하는 것, 예수가 가르친 ‘죄사함’입니다. 하늘 나라가 네 우리 안에 있다는 가르침은 저울의 정지. 천칭의 수평, 공정성의 심판을 멈춘 것으로서의 정의입니다. 뒤에 나오는 ‘배제를 배제하는’ 자비입니다. 세르는 피아나 팡토프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천사도 짐승도 아니라고요. 그저 육신이라고요. 육신은 이미 동물이고 인간이며 천사입니다. 육신은 메시지들이 육화하며 개체로서 나타나고 있는 표면입니다. 내재성의 그 부단한 출현은 선악을 모르는, 저울의 부동의 평형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그저 인간일 뿐임을, 매번 출현하는 육신일 뿐임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우리가 아는 ‘사랑’의 방식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의 경우처럼, 문제는 자비가 되겠죠.
3) 사이비 신들 : 신-도시의 다신교는 적대의 방향을 무수히 확장한다
“중세에 기독교가 다수였을 때, 그들은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규정하고 징계했지. (...)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날 세계의 비非신자들이 되었어. 정치와 공연물의 신들도, 돈과 경제의 신들도, 공학과 과학의 신들도 믿지 않기 때문이야.”(198쪽)
세르는 우리의 신-도시인들은 다신교로 회귀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돈, 경제, 정치, 오락이라는 여러 가지 신을 섬깁니다. 그것들을 신으로 모시지 않는 종교인들(일신교도)는 가짜 신자가 되었습니다. 신-도시 다신교도는 경제와 석유를 섬기기에 중동을 파괴했지만, 그곳은 문명의 발상지이자 성서에 에덴으로 명시된 ‘성지’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을 파괴했던 것입니다. 사이비 신이 늘어나니 적대의 방향도 무수히 많아졌습니다. 일신교나 다신교나 육신을 육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빌라도의 선언으로부터 세르는, 예수를 죄인으로도 유대인의 왕으로도 보지 말고 사람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을 인식하기 위해 추상적인 선언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죽음과 폭력 앞에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인간입니다. 이걸 보는 눈이 자비입니다. 인간을 다른 무엇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자비의 눈 없이 정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 없이 자비 없지만, 기회균등 없이는 정의도 없어.”(203쪽)라는 마지막 문장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4)‘악마의 증오’ : 어떻게 내면의 원한을 연료로서 태워낼 것인가?
“맞아, 성스러운 것은 끊임없이 ‘아니’라고 뒤풀이할 때, 거룩한 것은 ‘예’라고 말해. 거룩한 것과 반대되는 것은 거부하는 반면에, 거룩한 것은 받아들이고 포함하지. 거룩한 것은 사랑하고, 그 밖의 것은 증오해. 고딕 양식에서는 내부에 신성함이 있는데, 이 신성함은 바깥쪽으로 추방된 성스러운 것의 반대야.”(213쪽)
장에서는 내면의 원한과 질투와 증오를 태워내는 문제가 이야기되었습니다. 성인적 ‘너그러움’은 안으로는 차갑고 밖으로는 폭력의 가시와 불을 뿜는 ‘성스러움’과는 다릅니다. 관용은 글쓰기와 같은 창조적 실천으로 내적 악마를 태워내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생산’의 산물입니다. 그렇기에 창조는 어떤 건강함과 승리의 징후입니다. 세르는 창조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작품에는 혐오의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에서 하나의 방향 백터가 됩니다. 우리는 미묘한 냄새로부터 나아갈 쪽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은 폐허에서 가능합니다. 성인들만 있고서는 생산이 불가능하죠. 생산은 자기 내면의 증오를 태우고 나서야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어진 ‘지배의 천사들’과 ‘자비’ 챕터에도 역시 ‘거룩한’(내적으로 태워내어 창조적인) 문장들이 많았는데요. 위에서 약간 나오기도 했으니 지면 관계상 여기서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숙제방에 올라온 발제에서 확인해주세요!
다음 시간(4.4) 공지입니다.
-<디가니까야> 11, 12, 13장(475~571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적어옵니다.
-<천사들의 전설> 끝(255~303쪽)까지 읽고 챕터별 발제를 해옵니다. 점등시간(은이샘), 치품천사(미영샘), 성탄절(혜윤샘), 에필로그(라니샘), 전체 질문(윤순샘, 민호)
민호샘, 이리 빨리 올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난 시간 공부한 내용이 더 뚜렷하게 윤곽이 잡히네요.^^
전 '세르가 인간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을 추상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으로 지칭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MN.은 중부경전인 맛지마-니까야를 말해요.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일 뿐'이라는 슬로건에서 천칭의 균형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죽어라 외치는 공정함이 실제로 공정이 아닌 수 많은 반전법칙의 부분일 뿐이라는 것과 불공정을 낳는다는 것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세르가 찬양도 혐오(사이비 신들과 제3, 4 세계)도 인간이 만들어 낸다는 무서운 현실을 밝히면서 인간인 우리이기에 고통에 더욱 민감해야 한다는 당위에 이르게 된 맥락이 <천사들의 전설>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