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4./ 『지혜와 헤르메스』 1학기 8주차. 세미나 후기
오전- 『디가니까야』 1품 11장~13장(P475~571). 공통과제를 중심으로 토론.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라문 로힛짜는 세상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착하고 건전한 것을 얻을 수 있더라도, 착하고 건전한 것을 얻은 뒤에 타자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획득한 착하고 건전한 것은 스스로 존경하고 존중하고, 나중에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타자를 위해 설하는 것은 예전의 속박을 끊고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악한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회의적으로 말합니다. 이 말의 밑바탕에는 ‘타자를 바꿔야 된다.’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으나 자신도 뭘 할 수 없는 지경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실 로힛짜는 깨달은 자도 아닙니다. 그저 상상을 기반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과정을 겪지 않았으니 ‘나나 잘하자’라는 생각에 빠진 게 아닐까요? ‘나나 잘하자’를 밀고 수행하다보면 나에 속하지 않는 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타자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행의 입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 될지 의문입니다.
로힛빠의 생각은 악한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리지 않는 것이 왜 연민의 결여일까요? 착하고 건전한 해탈의 원리는 연민을 바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출가와 수행과정을 생각해 볼 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연민이란 무엇일까요? 가깝거나 잘 아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민은 합리적이지 않은 관계, 즉 타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마음이지요. 이 마음은 즉각성을 요청합니다. 비무량심과 연결되는 연민은 행으로 즉각 펼쳐져야 하는 것이지요. 행으로 이행되지 않고 연민에 빠져있기만 한다면 자기를 고착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신체의 문제로 무기력과 싸우며 자신을 구하는 행동이 긴급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존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누군가 마을에서 생산되는 것을 바라문 로힛짜 혼자서 향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로힛짜 자신이기도 합니다)로힛짜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방해가 되고, 그들의 이익을 원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익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는 적대적인 마음은 일으키고,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가 되어 지옥이나 축생의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하나의 길로 간다고 말해줍니다.
깨달음을 혼자 향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은 질책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깨달음을 타인에게 알리는 과정은 불안과 위태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충분한지 의심스럽고 타인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무척 큽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곡과 오도의 길로 빠질 수도 있구요. 부처님이 깨달은 직후 고민하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만족하는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을까요? 스승의 자세는 어떤 질책도 무릅쓰고 나아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 같습니다.
가르침의 도리가 끊기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허물이 있습니다. 사향사과의 길인 승가의 흐름이 끊기고, 천상에 태어나는 길이 막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자이든 배우는 자이든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믿음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으며, 현재의 수행조건에서 공손함과 인내심을 갖추고 정진하여 지혜를 기른다면 수행의 길에서 퇴전하지 않을 것이다.
오후- 『천사들의 전설』 밤과 자정, 에필로그 (P253~303)
<밤- 점등시간>
점등이란 불이 켜지는 것이지요. 자연의 빛과 천사들은 점차 사라지고 인공의 빛, 인간들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일까요?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계속 퍼져나가 우리시대까지 이르는 지도와 인간이라는 종과 언어의 계통수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인간 종 안에서도 다양한 생명체의 분파를 찾아볼 수 있지만 인간은 고통에 신음하여 폭력, 죽음에 취약하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본질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온순하지만 심술궂고, 악하고, 거만하고, 잔혹하기도 합니다.
공항 대기실의 천장에는 세계의 모든 항공사에 소속된 비행기 모형이 매달려 있는 모빌이 있습니다. 비행기 모형들은 미미한 바람에도 회전목마처럼 움직이고 작은 원을 그리며 뱅뱅 돌기도하며, 이웃했던 것들은 멀어지고,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은 가까워지며 모두 서로 만날 가능성을 연출합니다. 비행기 모형들이 생성하는 원무는 서로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집에 머무르지 않고 공항으로 와서 형성하는 줄과 같습니다. 공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뒤섞이며 서열이 아니라 이웃관계, 경멸이 아니라 공평성, 불공정이 아니라 방문이 있을 뿐입니다. 평등을 가져다주는 이런 장치들은 우리가 신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막기에 이상적인 철학 기계 같습니다.
비행기 모형에 우리의 육체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올려봅니다. 이처럼 과학은 기능, 기관, 근육, 세포, 등 요소들을 분리하여 분명하고 효율적인 것들을 창안하지만, 의사는 이 구별된 것들을 혼합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 융합된 동시에 분리된 합금은 우리의 육신인 것이지요. 이런 육체를 부여함 없이 지식도 없습니다. 혼합은 질서나 분류와 모순 없이 일어나며 혼합 없이는 우주도 없습니다. 이 역도 성립하여 혼합의 결과인 다양성은 우주의 배치 법칙을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인간의 뒤얽힘인 전쟁과 전투, 분열은 역사를 만듭니다. 적을 사랑하고 적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여성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바로 거기에 혼합, 시간, 변화, 진전, 진보가 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은 역사가 결코 말하지 않은 하나의 영원한 존재를 구성합니다. 그들은 여행객들보다 훨씬 많지만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밤- 치품천사>
공항은 기착과 통과의 장소이며 언제나 잡다한 사람들이 뒤섞이며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두 번 지나가는 일은 거의 없으며, 모든 이가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상황이지요. 치품천사는 존재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이는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가고, 오지 않은 듯 떠나고, 확고부동한 사물들을 버리고 투명하게, 공기처럼 텅 비고 순수하게, 빛으로 가득하게 되는 기술로 자기 자신을 숨기고, 날아갈 정도로 몹시 가벼워지는 미묘한 즐거움입니다. 진공 속에서 살며, 침묵에 귀를 기울이거나 정적과 어둠에 잠길 때면 부재의 상태로 접어들면서 무(無)와 접속하게 됩니다. 무(無)란 소음과 접속하고, 다른 몸들과 융합하는 것입니다.
메시지 전달자인 천사들의 작업 덕분에 이 세계는 경이롭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메시지 전달체계는 권력과 영광, 폭력과 불행만을 높이고, 이 과정에서 부당한 위계를 무수히 구축할 뿐입니다. 이는 과학과 법의 엄정성,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힘이 냉소적인 관계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이 세계의 경이로움에 대해 경탄과 감동, 황홀에 이끌리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세계의 매혹을 재현하고 밝히고 상술하고 늘립니다. 세계는 몹시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들은 풍부하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락한 천사들로 있는 법이지요. 그들은 몽니를 부려 재해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입게 합니다. 인간들 또한 자연을 은인에서 악한으로, 천사에서 악마로 예고 없이 바꿔 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이러한 이중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을 사랑하여 악마, 악한, 가증스러운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타락했지만 천사들입니다.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하고 드문 순간들은 사랑에 빠져 있던 때입니다. 사랑에 의해서만, 사랑과 더불어서만 선량함과 창조성, 유일하게 값있는 미덕이 있는 법입니다. 몸은 사랑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생겨나지도 시작되지도 형성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생각도 무의미합니다. 사랑은 기반으로서 떠받치고 지탱하며, 불과 에너지로서 움직이게 하고 뒤흔들고 변화시키고 변형하며, 메신저로서, 인정되고 이해된 메시지로서 날아가고 큰 기쁨을 준다는 점에서 모든 철학의 요점입니다.
<자정- 성탄절>
시선과 소리가 제한되지 않는 광대한 공간이 펼쳐진 시골에 비해 도시는 소음과 공해, 산업의 끊임없는 울림이 모든 공간에 펴져 있어 시각은 가로막히고, 청각은 차단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시간을 잡담과 언어활동으로 채우고, 각종 광고에 노출되어 청각적 표상이나 이미지로 현실을 포장하며, 사랑을 저버리고 생명을 고찰하지 않고 일시적인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 할뿐이죠. 이 도시에서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천사들은 메신저이자 수호자, 조언자로서 지구 전체의 구제에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 옛날부터 세계를 바꾸려는 일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르는 그들의 지능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즉 천사들은 몸이 없으며, 순결주의로 가득하고 지적이기 때문에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성탄절에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육신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육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창조와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창조는 모든 정황들이 응축되어 있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메시아의 탄생은 땀과 배내똥, 피아 침, 목재와 우유, 밀짚과 두엄, 산모의 고통, 세 목동의 선물 등 모든 정황들이 혼합되고 결부된 극적인 사건이었지요. 극적인 사건은 평범하고 따분한 것과 미미하고 미세한 차이 밖에 없지만 강렬하고 확실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경험이 됩니다.
오늘날 신-도시와 구-도시는 폭력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늘 전쟁, 고문, 억압, 살인을 일삼고 있습니다. 영광과 권력이 주는 힘과 허영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광을 위한 전쟁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킨다면, 아무도 영광을 원하지 않아야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영광의 유혹이 없다면 일관성 있는 우리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가를 너무 많이 지불하지 않도록 할 수는 방법을 제안해야 되겠지요. 세르는 여기에 종교성을 도입합니다. 아버지가 금지의 대상을 아무리 높은 곳에 두어도 아이는 그것을 찾아내고 맙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매번 패하는 구조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절대 최상급의 전략은 역할을 바꾸는데 있습니다. 아이가 금지의 대상을 잡기 위한 매개 요소들을 찬탄할 만큼 영리하게 찾아내지만, 그 요소들은 금지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복통을 야기할 위험만 있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사물들의 이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숨기는 것과 찾는 것은 같은 메커니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을 상정하여 하느님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 높은 곳의 차원에 위치한 하느님에게 권능과 영광을 돌린다면 누구도 그 높이에 이르지 못하므로 우리는 서로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이고 유일한 신, 그분만의 영광은 평화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경전을 펼쳐두고 소설을 쓰듯 가설과 추측을 쏟아 놓았던 시간, 천사 이야기를 펼쳐두고 더듬더듬 세르를 따라갔던 시간을 다시 되짚어볼 수 있던 후기였습니다. 읽으면서 슈슈숙 복기되는 것 같아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ㅎㅎ
연민 혹은 비심이라는 마음 작용의 독특함을 더 고민해보고 싶고,
또 육화라는 사건 속에서 천사와 메시아(중개자)의 사라짐도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세이 주제와도 닿겠네요!
저희가 뒤로 남긴 수많은 질문들과 미결점들로부터
'고통과 지혜' / '천사와 붓다'라는 주제로 이렇게 저렇게 얼개를 짜 와 봅시다!
다만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지 말고, (세르의 독자답게) 국지적 연결을 시도해 보아요~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다소 어리석고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이 질문에 대해 두 현자는 같은 대답을 내놓죠. 해야한다의 당위적 대답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역설합니다. 근데 타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전 정말 이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자를 위해 뭔가 행하고 뭔가를 주려고 애쓰는 건 너무 쉬운데...진짜 타자를 위한다는 게 뭔지...타자를 위해 뭔가를 정말 할 수는 있는 건지...총체적으로 의심이 가거든요. 세르 역시 이런 이기적 마음에 일침을 가하며 우리가 절대 가닿을 수 없는 절대자를 우리 의식에 상정해야한다고 얘기합니다. 절대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이렇게 두 현자를 따라가다보면... 너무 수긍이 가다가도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고민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 생각의 습관 어찌 해야 할까요?
미영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에세이 개요 들고 수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