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글은 규문 선생님들께서 그리는 청년들의 작업에 대해 자유롭게 해석하고, 비평하고, 질문하는 장으로서, 9월 한 달간 공개될 예정입니다. 그림이 주는 인상, 자의적인 해석, 방향에 대한 질문 등… 어떤 내용이든 좋습니다! 댓글로 300자 내외의 토막 리뷰를 달아주세요. 그리는 청년들은 바깥을 만나는 방법이 되고, 규문 선생님들께서는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1. 소개
김민서(@iiseoeo)는 홍익대학교에서 디자인과 회화를 공부하고 있다. 아크릴화, 유화, 디지털 프린팅 등 평면회화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하지만 매체를 고정하지 않고 실험하는 중에 있다. 그림은 자기 표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선천적 천식으로 호흡을 의식하던 경험, 어른들이 체면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김민서는 주로 신체에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을 본능적으로 끌리는 색채와 형상을 통해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요소들의 장식성이 대상의 내면을 보이는 동시에 민낯을 감추는 이중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민서의 그림에는 신체 위에 직관적으로 사용한 색채와 형태가 장식적으로 엉켜있다.
2. 전시 작품
위치 소개: 형亨-규문홀, 이利-규문각, 정貞-규문각 안쪽
호흡뼈, 2022, 아사천에 아크릴릭, 디지털 프린트, 87.7х63сm. 위치: 형亨
충격 아우라 진짜 있음, 2022, 캔버스에 유채, 72.7x53cm. 위치: 형亨
산촌여정 분해, 2023, 트레이싱지에 디지털 프린트, 29.7x21cm. 위치: 형亨
A masked nude, 2022, 캔버스에 유채, 72.7x53cm. 위치: 정貞
(1부 전시 전경)
3. 인터뷰 및 포트폴리오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U56VK4XmUpWZru8h7PnFn5BXA9IEzfLy?usp=drive_link
민서샘은 보이지 않는 것,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을 매우 촉각적이고 관능적으로 표현했다. 구상적인 것에 갇히지 않기 위해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거나,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데, 민서샘의 그림은 후자인 것 같다. <호흡뼈>와 <충격 아우라 진짜 있음>은 외관 아래에 있는 무수한 힘들, 이들의 작용이 잘 드러난다. 전반적으로 색채의 대비와 운동이 눈으로 그림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불어 넣었다. 피부와 같은 외관, 표상을 걷어내고 보이지 않지만, 살과 뼈처럼 더 실재적인 것들을 그린 것으로 사료되는데,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김민서 작가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칭과 이중 구조는 투명하게 여러 겹 중첩된 레이어와 함께 평면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작가는 거울, 뼈, 유리와 같은 반사 소재들을 사용하며 어떤 유동적인 것을 순간적으로 응고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천에 그린 <호흡뼈>는 호흡의 들숨 날숨의 과정이 한 평면에 동시적으로 응축된 것처럼 보이며 그것이 신체-내부의 풍경이라면, <신촌여정 분해>는 그것의 외부 (풍경) 버전 같다. 작가는 호흡뼈로 신촌 거리를 호흡하고 그 호흡의 흔적들을 풀어낸다. 그녀의 호흡은 이어진다기보다 분절되고 분절된 호흡들은 중첩되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시간들을 접합하는 기예를 선보인다.
김민서의 그림에서 공통적인 특징은, 내용에 대한 집중을 분산시키는 여러 장식요소들이다. 특히, <산촌여정 분해>에서는 아름다움을 우선시하느라 오히려 읽기 어려워진 배치가 흥미로웠다. 책의 역할을 산문의 온전한 전달로 국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책은 화장(형식)을 통해 민낯(내용)을 감추는 거 같은 인상이다.
화려함, 장식, 대칭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하는 저 그림들은 우리들이 '신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에게 보이고, 좋다고 평가받고, 인정받아야만 존재 가치를 느끼는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부끄러운 순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민서가 제시하는 솔직함의 본질이란, '결코 나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싶지 않음' 인가? 모순적이어서 재미가 있다.
'a masked nude'에서는 모든 의복을 벗었음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델의 얼굴이 참 궁금했다. 상대는 이미 많은 것을 드러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통해 자신의 '벗기고 싶은' 욕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것은 곧 상대가 감추려는 의도가 보일 때 더욱 강해지는 거 같다.
민서가 그리는 신체는 기능보다 시각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장식적'이다. 그리고 장식은 보는 사람을 전제로, 대상에 머무는 개체이다. 그럼, 민서가 제시하는 장식적인 신체는 '기능적인 역할', '능동성'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인가? 민서가 생각하는 신체의 의미와 가능성이 궁금하다. 저들은 화려함이 없이도 자기를 긍정할 수 있을까?
김민서의 피부 아래
<호흡뼈, 2022, 아사천에 아크릴릭, 디지털 프린트, 87.7х63сm.>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영화 ‘언더 더 스킨’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보면서 피부에 주목한 나는 김민서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피부 아래에 관심이 갔다. 앞의 두 작품에서 피부 아래는 ‘인간’ 너머였다. 불쾌하고 끔찍한 날 것. 작가는 피부는 거짓이고 그것을 벗기면 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껍질과 알맹이의 이분법. 피부는 명함이다. 더 확장하면 피부는 깊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는 피부에 코드를 걸친다. 어쩌면 피부 자체가 코드일지도. 여성의 피부 남성의 피부 젊은이의 피부 늙은이의 피부 부르조아의 피부 노동자의 피부. 따라서 피부는 피부 아래 동그랗고 순수한 영혼의 껍질이 아니다. 피부를 한껍질 벗겨보라. 그런다고 참된 실재가 두둥 나타날까. 피부의 아래는 또 한 겹의 피부일 뿐. 피부 아래는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다. 아니,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전혀 본 적 없는 광경일 것은 틀림없다. 작가는 예술이 ‘자기표현’이라고 한다. 어젯밤 읽은 백남준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말했다. “정말 나 자신을 표현하려 했다면 다른 걸 했을 거예요.”
작품을 처음 본 상황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서 작품의 크기, 재료의 정보 없이 휴대폰 화면으로 민서 작가의 작품을 먼저 보게 되었어요.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색감이 화려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규문 공간에서 실제 작품을 마주했을 때, 작품 크기나 색감도 다르게 느껴졌고요. 작품이 놓여 있는 공간에 따라 작품이 맺는 관계가 작품을 다르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1) 이번 규문 전시에서 어떤 기준으로 배치하고 설치하였는지...
질문2) 자기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매개공간에 대해 작가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백색 공간의 전시장, 규문, 디지털 기기 속 작품)
A masked nude
누드화는 회화의 전통적인 주제였으며,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누드화의 변주를 통해 역으로 시대를 비춰보기도 할 정도이니. (지난 학기 우리가 인상깊게 감상했던 마네의 올랭피아를 잠시 떠올려본다) 김민서 작가의 마스크를 쓴 누드화는 두 가지 소품을 통해 이 시대의 키워드를 뽑아낸다. 파란염색머리-mz, 마스크-covid19.
작가와 또래인 제현샘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자리를 갖는 건 크크랩에와서가 처음 인 것 같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세월호, 코로나 등일련의 사회적 사건으로 한데 모여본 경험이 적은 이 작가가 지나왔을 유년기와 청년기는 나의 것과는 다르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누가 보기엔 한창 젊을때일 내 나이에도 어떻게 보면 불량청소년의 상징처럼도 보이는 염색머리와 마스크안에 새겨진 시대의 소용돌이를 견뎌낸 이 시대의 청년의 고독이 느껴지는 듯하다. 붉고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는 푸른 빛의 피부 묘사는 멍같기도, 'blue‘의 직설적 묘사같기도. 규문의 거실의 정면에 배치한 대담함과 체모까지 깔맞춤한 디테일도 인상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