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글은 규문 선생님들께서 그리는 청년들의 작업에 대해 자유롭게 해석하고, 비평하고, 질문하는 장으로서, 9월 한 달간 공개될 예정입니다. 그림이 주는 인상, 자의적인 해석, 방향에 대한 질문 등… 어떤 내용이든 좋습니다! 댓글로 300자 내외의 토막 리뷰를 달아주세요. 그리는 청년들은 바깥을 만나는 방법이 되고, 규문 선생님들께서는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1. 소개
김신영(@shin0kim)은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주로 종이에 먹과 색연필, 볼펜과 붓펜을 오며, 다수의 드로잉 경험을 기반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출몰하는 즉흥적인 이미지들과의 마주침 자체를 유희하고 종이 위에 정착시킨다. 시인 김수영의 수필인 <장마 풍경>에서 모티브를 얻어 ‘풍경을 사는 것’의 나름의 실천 방법으로 걷기와 드로잉의 유사성을 활용해 작업한다. 김신영은 그림을 그리는 일의 불분명한 좌표, 목적지 없음, 방향 상실, 체력 부족, 기반 없음, 이유 불분명함과 같은 이 시기의 피로한 고민과 그럼에도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이고 있)는 상황의 불안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평소 쉴 새 없이 낙서하는 버릇을 확장하여 빠르게 미끄러지듯 그려내는 신영의 그림에는, 풍경의 인상이 복잡하고 두루뭉술한 형태로 엉켜있다.
2. 전시 작품
위치 소개: 형亨-규문홀, 이利-규문각, 정貞-규문각 안쪽
바쁜 풍경, 2023, 순지에 수묵, 172x76cm. 위치: 형亨
장마 풍경, 2023, 종이에 먹, 20.5x29.5cm. 위치: 이利
야간 근무, 2022, 종이에 붓펜, 26x18cm. 위치: 정貞
바쁜 드로잉, 2023, 종이에 붓펜, 29.5x20.5cm (x2개). 위치: 정貞
<흐린 눈>
추가로 드로잉이 함께 전시될 예정입니다.
(1부 전시 전경)
3. 인터뷰 및 포트폴리오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U56VK4XmUpWZru8h7PnFn5BXA9IEzfLy?usp=drive_link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광고 문구가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우리는 매우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바쁜 걸까? 우리가 쉬고 있는 순간에도 신체 기관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며, 자연도 끊임없이 생로병사를 겪으며 움직이고 있다. 신영샘의 <바쁜 풍경>, <바쁜 드로잉>은 삼라만상, 세계가 다 활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붓펜과 손이 일체가 되어 눈앞의 풍경에서 포착되는 힘과 에너지, 움직임을 미세하면서도 생생하게 펼쳐낸 듯하다. 바쁜 시리즈가 어떻게 더 다양하게 구현될지 기대되고, 전시된 그림은 무채색인데, 색채를 배제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신영의 그림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인상이 큰 차이를 갖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거리를 두고 보면 구상의 군집을 묘사한 그림 같지만, 다가갈수록 형상은 해체되고 추상만이 남는다. 멀리서 마주한 건 그가 그려낸 풍경이 아니라, 내가 떠올린 풍경의 기억, 관념들이다. 그 순간 그림을 통한 창작의 주체는 감상자로 이전된다. 표피를 미끄러지듯 그려내는 그의 그림이 드러내는 것은 감상자의 심층인 것이다.
그것은 신영이 그의 드로잉에서 색을 사용하는 방식과도 닮아있는데, 색연필을 눌러 색을 온전히 채우기보다는, 옅고 희미한 선이 여백을 품은 채로 여러 번 겹치기를 택한다. 여리고 불분명한 것들이 겹쳐져야 비로소 색을 만들고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대담한 연설보다 속삭임의 모음집 같다. 선이 먼저 자기를 주장하기보다는 감상자에게 말할 기회를 허락하고 그림 안에서 문장을 이리저리 엮어낼 여지를 남기는 것이 같이 있으면 편해지는, 조용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모호한 선을 노니며 내 안의 장면을 만든다. 신영의 말처럼 마음 속에 풍경을 갖게 된다.
인물들이 배경에서 스리슬쩍 스윽하고 등장한다. 배경과 인물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연결되며 하나의 흐름 속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하다. 붓펜(붓이면서 펜인)이라는 매체가 가진 독특성 - 다루기 녹록지 않은 그 쫀득한 탄력의 힘 - 이 작품 공간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며 그 만의 이야기를 펼쳐가는 듯하다. 즉, 붓펜 끝이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여백의 공간과 그 형상은, 마치 귀를 기울이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가 플레이 될 것 같다. 혹은 그러한 이야기가 몽글몽글 피어나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 구름 속을 걷는 것과 같은 기묘한 공간감도 느껴진다. 바셀린 위에 색연필로 표현된, 촉촉이 기름 먹은 불투명 색감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도 매우 신비롭다.
볼펜은 흔히 쓰는 것이라 그 사용에 능숙할 것 같다. 하지만 미끄러지기 쉬워 획을 그을 때 힘조절에 꽤 신경을 써야하고, 그 굵기 등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용이한 도구가 아니다. 또 한번 그은 선은 지울 수 없고 다음 획으로 덮어서 그 잘못된 것을 가리거나 고치기도 어렵다. 익숙하다는 관념 속에 꽤 많은 까다로움이 볼펜 속에 숨어있는 것 같다.
볼펜으로 그려진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무수히 많은 장면(시간)들이 떠올랐다. 등뒤에서 바라본 엄마의 손, 빛이 쏟아지는 창문 앞에서 밖을 내다보는 이의 얼굴 등. 화가에 의해 포착된 그 손을 엄마 자신은 보지 못하는 순간이고,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이도 정작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수영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자신의 뒤통수를, 모자도 모자 자신을 응시할 수 있을까. 자신 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응시되지 않고 포착되지 않는 그 많은 순간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룬다. 대부분은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을 구성한다.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많고, 볼 수 있는 것 외에는 볼 수 없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 포착되지 않는 이 무수한 장면들은 어디에 저장되는 걸까.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김신영의 풍경에 랜딩하다
<바쁜 드로잉, 2023, 종이에 붓펜, 29.5x20.5cm (x2개).><장마 풍경, 2023, 종이에 먹, 20.5x29.5cm.> <야간 근무, 2022, 종이에 붓펜, 26x18cm.>
풍경에 착륙한다는 의미를 나는 이미지의 바다를 서핑하다 빠져 죽는 줄 모르는 우리 시대 정처 없는 떠돌이들의 각성이라 생각한다. IT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우리가 밥 대신 칩을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작가에게 “가지고 싶은 풍경”(풍경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를 배는 게 아니라 아이를 가진다고 표현하는 요즘 세대들)은 작품이 발딯고 설 근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작가가 돌아가 고향으로 삼고 싶은 풍경은 조만간 부동산 개발에 저당 잡힐지 모른다. 나는 작가가 일단 풍경에 주목한다는 것이 놀랍고, 한편 따뜻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부동산을 얻는 대신 풍경을 잃었다. 작가의 그림을 보다가 시인 김수영의 ‘장마 풍경’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쁜 드로잉>에서 느껴지는 향수(鄕愁).
수묵과 붓펜으로 새롭게 감각되는 것이 흥미롭다. 작가의 아무것도 하기 싫음, 방향성 상실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 깨알같은 유머러스한 표현이 작가의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다. 자세히 들여야 볼수록 빠져든다.
신영의 풍경은 바쁘다. 명확하지 않은 형태가 운동을 만들어내고, 연습에 기대어 일필로 획을 맺어야 하는 수묵과 붓펜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의 기세를 포착한다. 잔상같은 모호한 형체들은 시선이 훑고 지나간 거 같다. 신영이 제시하는 화폭에는 만들고 사라지고, 기억에 남고 잊혀지고, 흥미가 가고 사라지기를 정신없이 반복하는 세계가 느껴진다.
바깥이 급변하는 중에 작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작가는 <흐린 눈>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눈을 작게 뜨고 응시하기다. 그것은 '내게 거슬리더라도 애써 넘어간다'라는 뜻의 신조어 '흐린 눈'의 태도로, 위 아래를 오가는 흐린 선을 겹쳐 쌓아 자신의 주변부를 섬세하게 묘사한 드로잉 연작과 상응한다. 정신 없는 세계에서 잠시나마 눈길로 포착한 것들을 한땀한땀 직조해낸 것 같은 그의 묘사는 대상을 붙잡는듯한 인상도 든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선 흐린 눈이 필요하다. 주어진 것을 향한 그 희미한 시선은, 누구보다 촘촘히 바라보는 선이 아닐지. 생경한 것을 사랑하는 방법이, 반복해서 보고 익숙해지는 것이라 한다면 그의 작업은 낯설게 주어진 눈 앞의 것들을 사랑하는 방법으로도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