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회귀하는 삶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이 영화는 자연의 사운드로 가득 차 있었다. 풀벌레나 새가 우는 소리, 계곡의 물소리, 소울음 소리등 자연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나지막한 목소리의 배경이 되거나 심지어 압도하고 있다. 여기에 SF 영화처럼 신비롭게 들리는 사운드가 함께 한다.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엉클 분미의 아내나 아들과 대화할 때나 그가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갈 때도 이런 사운드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감독은 왜 이런 사운드를 보여주고자 했을까? 묵시론적 메시지일까? 자연의 소리들은 인간은 신체에 스며들어 태초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이라는 타자는 인간의 모체이며 결국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문명이 그어놓은 선은 허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감독의 다른 영화 <열대병>에서도 사운드는 도처에서 출몰한다. 생각해보면 자연이 내는 소리는 항상 존재해왔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반해 도시에서는 문명이 만들어낸 각종 뉴스나 까페의 음악 또는 차량들의 경적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닫힌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 두 모녀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젊은 승려가 호텔방에서 TV를 시청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세 인물이 뉴스에 고착되었지만 승려와 어머니의 분신이 나와서 호텔을 벗어나 까페로 향한다. 왜 분신을 등장시켰을까? 왜 딸을 놔두고 두 사람만 빠져나왔을까? 뉴스에 붙잡힌 영혼을 뒤로 하고 새로운 분신이 된 모자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까페에서는 승려와 재가신도라는 인위적인 구분이 없다. 엄마와 아들로서 잔잔한 대화가 흐르고 노래가 울려퍼진다. 영화는 컷백되어 호텔방에서 함께 뉴스를 시청하는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그렇다면 까페 장편은 환상이었을까? 모자로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호텔방에 세 사람이 머물러 있는 채로 끝나고 만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공주와 하인의 연애 장면에서도 펼쳐진다. 하인과 키스를 나누면서 자신보다 신분을 더 사랑한다는 걸 안 공주는 이별을 결심한다. 대신 얼굴이나 신분을 판단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물고기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른바 ‘어간’으로 볼 수 있는 충격적인 쇼트였다. 채씨네 참석자들의 당황스러운 웃음과 유머가 뒤섞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문명이란 틀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어류는 생식 세포 발전단계에서 보면 포유류보다 훨씬 이전에 발생한 생명이다. 어류는 다시 포유류로 진화해왔으니 물고기를 우리의 전생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분미의 아들 또한 얼굴과 온몸에 털이 나고 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다. 30만년전 동굴에서 서식처를 마련했던 원시 인류로 되돌아간 모습이다. 그는 사진 작업 통해 산속에서 낯선 존재를 찾아다니다 스스로 그런 존재로 변해버렸다. 그가 말했듯이 <원숭이 고스트>는 우리가 어렸을 때 들었고 소통할 수 있었던 그런 존재였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다.
어른 세계에 접어들면 <원숭이 고스트>는 더 이상 인간세계에 머물지 못핬다. 문명에서 보면 이미 이해불가한 너무나 먼 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 맞게 기호화된 동물을 사랑한다. 정서적으로 동화될 수 있고 감정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받아들이지 못한 생명은 철저히 분리되어 정복과 사냥의 대상이 된다. 잡히는 순간 소멸되어 지는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지금도 멸종 단계의 동식물이 가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복과 동시에 동식물의 역습이 인류에게 깊은 상처와 질병을 남기고 있다. 자연의 교란자로서 인류가 맞이하는 결과일 것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질병이 어떻게 도래할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 10년전에 제작되었다!
생의 마지막 여정을 '동굴'에서 맞이해보는 것은 어떨까? 엉클 분미가 죽음을 위한 장소로 산속의 깊은 동굴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광대한 우주를 보는 듯한 스펙터클이 보여진다. 동굴에 촘촘히 박힌 광물이 빛을 반사하였을 때 밤하늘의 별처럼 펼쳐진 광경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것이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면서 느꼈을 감정이었을까? 삶을 마감하려 들어간 그 자리에서 인간에게서 내몰려진 <원숭이 고스트>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말한다. 동굴은 자궁과 같은 곳이다. 자신이 동굴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려 하지만 인간인지 동물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는 없다. 그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그는 꿈을 꾸었고 <원숭이 고스트>로 변한 미래도시에서 군인들에 붙잡혀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게 보여진다. 현재를 연장시켰을 때 충분히 예견되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동굴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매우 편안하고 담담해 보였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동굴로 회귀하는 분미처럼 문명이라는 폭력적인 상실증을 극복하고 야만의 세계로 내몰았던 다른 생명과 다시 화해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