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나는 슬프다. 내가 고수를 먹을 줄 알았다면 쌀국수의 진미를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는 욕심은 의욕을 돋우는 동시에 피곤하다. 음식, 커피, 술, 여행, 영화 등 내게 들어오는 모든 종류의 자극을 체험할 때, 나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의 a부터 z를 훑고, 그것의 정수를 뽑고 백미를 즐기고 싶다. 물론 그러기는 쉽지 않기에, (생선을 발라먹을 때 정도다) 나의 즐거움엔 아쉬움이 함께 남는다.
영화를 볼 때 특히 그렇다. 영화는 제대로 즐기기 위해 챙겨봐야할 요소들이 특히 많다. 영화가 시작할때는 틀린그림찾기 하는 사람처럼 눈과 귀로 영화를 구석구석 관찰하느라 날이 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요소들 중 어느 하나에 마음 둘 수 있다면, 작품에 몰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름다운 화면, 가슴벅찬 음악, 흥미진진한 줄거리, 매력적인 캐릭터, 낯선 세계(지역, 공간, 가치관, 도덕률)에 대한 간접 경험, 날카로운 메시지, 이 중 무엇 하나라도 나와 코드가 맞는다면 영화는 다른 장르의 예술작품들 보다 쉽게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라는데 별 감흥이 없는 영화를 만나면 당황스럽다.(딱 하나만 나랑 통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물론 영화제 수상이 명작의 기준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좋은 영화’로 중론을 모은 데에는 객관적인 근거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그걸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납득하여 나의 영화적 취향을 확장하고 싶지만, 한계에 부딪힌다. 어떤 감각/안목은 훈련되지 않는 것일까? 고수의 향을 악취로 인식하는 유전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몸, 감각방식, 취향이 저마다 다를텐데, 모든 영화를 즐기고 싶어하는 것이 욕심인걸까?
‘리바이어던‘에서 체험하는 영화라는 키워드로 ‘엉클분미’까지 이어진 ‘채씨네’ 1회차는 고수의 맛을 느끼기 위한 또 한번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이런 종류의 영화미학적 양식과 교감하는데 실패했다. ‘리바이어던’이 관객에게 그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함께하길 제안하는 롱테이크 씬들은 ‘배가 출렁인다’, ‘고기를 잡는다’,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항해한다’, ‘밤바다에 새가 날아다닌다’ 등의 문장으로 일출해버린 후 장면이 전환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마치 늦게 밥을 먹는 친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엉클분미를 처음보았을 때는 낯선 세계와 이미지, 소리, 이야기 전개 방식에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다시보면 무언가 체험할 수 있을까 기대해보았지만 어줍잖게 스토리를 알아버린 탓에 오히려 관습적으로 서사, 상징, 의미적으로만 보게 되어 영화가 더욱 밋밋하게 느껴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사는 남자 라는 평가를 머리로 어렵사리 이해하면서, 그 모호한 경계의 동시성을 어둑한 숲에 압도 당하듯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을 부러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