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감독 : 아녜스 바르다
-감상문 제목 : 줍는 엄마, 짜증내는 딸 그리고 버려진 세계
나의 엄마는 항상 두리번두리번하며 길을 걷는다. 어디 주울 거 없는지 살피면서 걷기 때문이다. 사실 과장 같은 말이지만 분명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어딜 가나 버려진 물건들이 널려있다. 그중 아파트 대단지가 가장 최적의 장소이다. 그곳은 한정된 공간에 여러 개의 쓰레기장이 배치되어 그 지점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꽤 쓸만한 것들이 버려지는 곳이다. 아파트의 평수가 큰 단지일수록 괜찮은 물건을 습득할 확률은 높아진다. 큰 평수에 살수록 물건을 담을 공간은 그만큼 넓어지며 그 공간을 채운 수많은 물건은 금방 질리거나 유행이 지나면 수명을 다한다. 그렇게 쓰다 버리면 그만이다. 엄마는 이런 세태를 나무라며 계속 주우며 다닌다. 가구뿐만 아니라 그릇부터 해서 가방, 바구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 사태는 엄마랑 싸움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처음엔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쓰다 버린 물건이 찝찝하고 왠지 이상한 기운을 몰고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미신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버려진 물건들을 나는 불길하고 지저분한 걸로 여기고 엄마는 또 쓸 수 있는 유용한 것, 버리기에 아까운 것으로 여긴다. 같은 물건이라도 보는 관점마다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 꽤 신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규문 채씨네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느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음식과 물건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도시의 식당 근처 쓰레기통을 뒤져 건진 음식들, 감자밭의 상품성이 떨어진 못생긴 감자들, 수확하고 남은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들…포도밭에서, 해변에서, 시장에서 사람들은 줍고 또 줍는다. 물론 비교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줍는 행위 속에서 엮어지는 서사가 의외로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주운 음식을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하고 감자밭 주인이나 어느 사과밭 주인은 일부러 농장의 한 귀퉁이는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둔다고 한다. 가져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감자를 줍는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월요일도 감자, 화요일도 감자, 수요일도 감자, 목요일도 감자, 금요일도 감자, 토요일도 감자, 일요일은 감자그라탕!” 하루에도 수십 개의 냉장고가 버려지는 데 그 냉장고를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 이렇듯 줍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어서 버리는 것에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줍는 행위는 거리를 관찰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관찰하지 않으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무감각해진다. 엄마도 줍기 이전에 거리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지 않았을까? 나야 어떤 목적지를 향해 정신없이 걷거나 음악을 틀고 무심하게 걷지만, 엄마는 달랐던 것 같다. 주변에서 나오는 소리,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놀잇거리들이 펼쳐진다. 이 영화는 감독이 직접 찍은 듯한 모양인데,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공중에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서 차를 그안에 넣어 잡는 듯한 놀이를 즐긴다. 어떤 그림을 비추다가 갑자기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온 자기 손등을 보고 늙어버린 자기 손이 짐승 같다며 즐거워한다. 어쩌다가 녹화 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을 깜박하여 카메라 뚜껑이 달랑달랑하며 찍힌 영상들도 잘라버리지 않고 그대로 영화에 싣는다. 감독은 뚜껑이 춤을 춘다며 좋아한다. 그녀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줍기 행위는 계속된다.
왜 줍는 것일까? 이 세계는 끊임없이 버리는 행위로 인해 새것을 생산해 낸다. 버리지 않으면 이 넘쳐나는 상품들과 음식들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 기능이 문제가 있어서, 닳고 닳아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보통 유통기한이 지나면 무조건 상한 음식으로 취급하는데 영화 속에 한 남자는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냄새로 알 수 있다고 한다. 내 눈에서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싫증이 나면 새로운 기분이 날 수 있도록 새것으로 갈고 있던 것은 버린다. 낡은 건물도 허물고 다시 세운다. 사람도 언제든지 뽑을 수 있는 인적자원으로 취급하기에 자르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다 버려지고 버려진 세계. 우린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때 감독은 줍기의 행위에 관심을 갖는다. 오로지 유용성과 시장성의 논리로만 판단되는 이 모든 버려진 것들을 (또한 버려진 이들) 줍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나바다 운동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다시금 발휘될 그 물건들의 역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뒤 발레의 시 ‘줍는 이가 길을 따라 걸으며 수확하는 이가 남기고 간 흔적을 줍는다.’의 의미는 버려진 물건들의 역사를 품고 주워서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는 존재의 심오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뭉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