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 크크랩–예술 평론가 되기 2학기 6주차 (2023.6.03.) 후기 / 2조 이동주
‘오버레이’ (2019,1판) 루시 리파드 지음 윤형민 옮김 / 현실문화 연구
돌과 선사시대, 그리고 페미니즘, 현대 미술까지
“돌의 선은 안으로 향하며 그 의미를 따르는 자를 인식하게 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것에서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또한 “돌, 신비의 돌, 중심에 평화가, 생식의 근원이, 이별 없는 영원성, 불멸성의 강렬한 기운을 저장하는 영혼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돌, 흙, 대지는 “모든 것의 근원인 전능한 여신이며”, “하늘과 땅 사이의 남성 남근(천국의 뿌리)으로도 상징된다.
인간은 자의식이 만들어지면서 스스로를 진리와 자연에서 벗어나는 인위와 대립의 구도를 만들어 왔다. 자연과 분리된 문화, 생성적 원천, 순환의 자연, 연결성을 부정하는 인간의 의식은 불안과 공격성으로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다. 순수한 대지의 이미지는 인간이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최초의 정원, 신의 성전, 곧 낙원 이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의 ”문명“과 자연으로의 ”돌아감“이다. 문명은 예술, 종교뿐만 아니라 전쟁, 탐욕으로 발생하는 생태적 재앙까지도 떠안는다. 따라서 인류의 모든 시대는 반생명으로 표상되는 문화적 파괴행위를 알아차리고(aware), 자신과 세계의 연결성 속으로 돌아가려는 반문화적 활동을 펼쳐낸다. 모든 시대에서 끝없는 분열과 전쟁, 유용성을 넘어서는 지점을 바라보는 순간 인간은 신성하다고 느끼고, 삶은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종교와 예술은 유용성을 넘어서는 무용성 개념의 생성과 창조, 만물과 열린 관계성으로 이어지는 범신론적 세계관의 연장이었다. 종교는 형이상학으로 이념화되고 예술은 감성적 의미화로 변질 될 때마다, 인간은 선사시대의 열림과 생성, 창조의 의식으로 되돌아 간다.
1960년대 후반의 새로운 패미니즘의 등장은 선사 모계시대 신화를 통해 예술의 무용성과 유용성을 모두 탈환하는 새로운 정신의 진전이다. 여성 패미니스트의 투쟁(?)은 문화와 남성을 상징하는 붓을 내려놓고, 행위 예술로 이어진다. 우리의 유용성에 길들여진 현대 의식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금기를 떨치는 변화“가 액막이와 치유과정의 일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여성 페미니스트의 예술 활동을 통해 현대의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향해 열려있고, 환경적 인류재앙에 이르는 길을 막아보려는 일련의 활동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패미니즘을 역사적 의미로 이해 하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체운쌤 강의를 통해, 위에서 얘기한 근대적 의미의 패미니즘을 넘어가는 확장성이 필요하다. 마치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신성인 범신론적 의미의 자아 (아트만)을 넘어서는 無我의 개념처럼. 이것은 신(자연)이 준 본질적 가치를 넘어서 구성적 관점으로 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패미니즘이 성(SEX)이라는 규정된 정체성에서 출발한다면 개념속에 구속되어 예술의 경계선을 넘어 갈수가 없다. 규정성은 어떤것과의 관계에서 일방적 요구이기에 폐쇄적일수 뿐이 없다. 따라서, 예술에서 규정성의 경계안으로 포섭되는 한계를 깨어 나가야 한다.
그런점에서 현대의 양자역학적 개념에서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쥬디 버틀러“가 얘기한 것처럼 ‘여성이나 남성의 정체성등, 아니 모든 것은 자체의 실체가 없다. 단지 작용만이 있다’. 이것은 허구적 담론이 아니라 양자 역학을 통한 실체적 이해이다. 현대 철학적 관점에서는 타자를 의식하며 타자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 우리는 나의 신체성을 넘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고 어떤 지점에서 누구와 무엇을 느끼는가에 맞추어져야 한다. 현대 예술은 PERFORMANCE (행위, 수행)으로 향해 갈수 있다는 말씀에 동감한다. 모든 것들의 모든 행위가 맥락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행위로 이어지는 PERFORMANCE. 이것을 통해 우주적 삶을, 생명의 한계를 넘어가 보려는 시도를.
'규정성은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일방적 요구이기에 폐쇄적일 수 뿐이 없다.' 라는 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확고한 규정을 바탕으로 관계에 임할 때는 관계에서 만들어 지는 새로운 것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서 관계 자체를 자신이 가진 규정의 도구로 가져가려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이때의 관계는 더이상 관계가 아님은 분명하지요... 이번에 읽는 '오버레이'는 페미니즘을 필두로 샘께서 큰 화두로 가지고 계신 영성의 문제와도 연결시켜 볼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샘의 열정과 혜안 다음주 토론에도 나누어 주세요 ~ 후기 감사드립니다 🙂
리파드의 <오버레이>를 통해 우리의 시공간적 감각이 확장되는 걸 느꼈고, 견고한 우리의 규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녀의 구분처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조차도 사회에서 규정된 것이죠. 우주에서는 남녀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정해진 규정은 없으니깐요. 저멀리 선사시대와 신화적 감각은 우리가 어떤 지반에 놓여있는지 볼 수 있는 렌즈로 작용할 수 있고, 이것은 우리가 다른 길을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데요. 특히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가는 측면에서 영감을 준다고 느꼈습니다. 리파드는 <오버레이>가 우리가 예술에서 잊어버린 것들에 관한 책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도 이 책을 통해 각자 묻어버린 감각, 감정, 생각들을 발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짧지만 깊이있는 후기 감사합니다.👍
예전에 다큐영화에서 퀴어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기독교 단체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놀랬던 일이 생각납니다. 저정도로 신의 뜻(?)을 어기면 막 패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 정체성, 자아 정체성, 국가 정체성등의 규정성이 견고하면 견고할 수록 그 폭력성은 점점 더 세지는 것일까요? 예술이 가진 힘, 경계 허물기, 새로 구성해 보기 같은 실천적 수행으로 무엇이 인간을 자유케 하지 못하게 하는지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돌 하나가 우리에게 어떤 길로 인도해 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당!!
인간의 역사가 ”문명“과 자연으로의 ”돌아감“ 사이에 있다는 관점과, 규정과 유용성을 넘어서는 지점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이 주역을 공부하는 저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네요.
동양 공부를 하다 보면 中을 해석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데요, 조금의 힌트를 얻어갑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힘이 中이 될까요? '돌'이라는 물상에서 출발해 페미니즘에 이르는 사유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역도 물상에서 출발하는데, 이렇게 사유가 유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네요. 동주샘~~간결하고 명확한 언어로 전해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