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예술이 누군가에게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부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회생활과, 또 균질화된 지배 문화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이질적인 가치 체계와도 결렬되기 때문이다.”(오베레이27p)
요즘 중세문명을 공부하면서 다시 한 겹의 ‘오버레이’된 세계를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게 중세는 하나의 신의 질서에 만백성이 조아리던 예속과 굴종의 시대, 암흑의 시대라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도 하나의 ‘파편’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보편’ ‘신’의 질서 속에 산다는 의미가 뭘까...반대로 그럼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뭘까요? 우리는 신이 죽고 난 이후의 세계를 산다고 합니다. 신의 질서 속에 산다는 것이 그동안 제가 품었던 부정적인, 그러니까 예속, 굴종의 이미지만으로 다가오지 않는 게 이상하죠. 다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신 없이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새삼 배운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이 뭘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에게 그것은 무조건적인 ‘흡수’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애와 같은 무전제의 신체는 이미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배운다는 것은 일단 동일화시키고 싶은 의지, 다시 말해 마주치는 족족 내 식으로 만드는 ‘마이더스왕의 황금손의 방식’을 일단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즉 무전제의 신체 ‘처럼’ 되기. 왜 ‘처럼’ 일까요? 우리는 여지없이 ‘사회 생활과, 또 균질화된 지배 문화’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키우고 살찌우고 골격을 형성했던, 하고 있는 그것, 간단히 객관화되지 않습니다. 왜냐, 살 속에 박혀있기 때문이죠.
제게 배운다는 것은 내가 쓰고 있던 개념이 너무도 다층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충격과 부끄러움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한 겹의 언어를 쓰던 그때의 나는 얼마나 가벼웠던가, 한편 얼마나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이었던가를 마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가 ‘예술이 누군가에게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부적절’하다고 했을 때, 저의 ‘직관적인’ 이해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즉 형상화된 그것은 ‘알을 깨고 나온’ 무엇이므로 무한히 번식한다, 그것과 만난 너는 무엇으로 바뀌고 있지? 너의 신, 너의 종교 아래 오늘도 평안한 표면을 두드리고 있는 것, 그것이 예술이잖아.
형태적 이해 / 구조와 체계 / 동시성
서두가 너무 길었습니다. 우리 ‘지안조’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모르는 채로 모르는 것을 모르게 막 떠들었던 그 현장을 떠올려보니, 분위기만 어슴프레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잠깐잠깐씩 아, 그게 그 말인가 보다, 라고 이해(오해)하는 순간들이 있긴 했습니다. 죄송한데, 제가 후기를 마음대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갔던 이야기를 기억하여 정연하게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는 강박을 마주한 채로 싸우고 있는 중 입니다. 저희 조에서는 대략 3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하나는 ‘삶의 형태적 이해’ (113p)에 대해, 다음으로는 ‘구조와 체계’(121p) 그리고 ‘동시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막막합니다. 일단. 샘들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 관계로, 그 시간을 겪고 난 후 제게 남은 이해를 정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지안샘은 과제에서 이번 장의 개념미술과 대지 미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짚어주셨습니다. 이번 장이 ‘시공간에 대해 고대 미술이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것을 현대미술이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보여준다면서 ‘시간을 형상화하는 고대의 방법이 현대의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주었다면, 공간에 대한 사유는 대지 미술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대지미술의 등장’의 배경에는 ‘미술작품이 오브제화되어’ 즉 상품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으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탄생한 것이 개념미술과 대지미술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비가시적 속성을 지닌 시간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시각예술에서 언제나 환기되는 테마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이 기호를 활용했다는 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기호를 가져온 것은 ‘햄릿의 맷돌’이라는 책에서 말해진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즉 ‘문자 이전에 쓰였던 숫자, 동작, 측량에 대한 만국공용어 같은 것이 존재해서 일정한 지식체계 없이도 일상적으로 통용’된 것이 기호라는 것이죠.
(121p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저는 기호를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듯 하나의 ‘상징’ 같은 것으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인에게 뭔가를 형상화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리듬의 문제’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자꾸 걸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대의 형상화는 엄격히 구전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더 난관인 것은 “구조는 체계 이전에 생겼는데, 그것은 체계가 구전될 수 없기 때문”이고 “‘법칙에 따른 표현이 조직적 사고 이전에 생겼기 때문에’ 예술이 분석 이전에 생겼다” 부분이었습니다. 제게 이 부분은 예술적 표현이 예술가의 이성적 통제에 온전히 갇히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요. 고대인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구조와 체계는 불가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체계가 삶을 질서 짓는 것으로서의 범주 같은 것이라면 구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암묵적인 토대 같은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정우샘께서 우리가 분절해서 사용하고 있는 시간은 어디서 온 것일까를 설명해주신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에게는 놀라운 ‘깨달음’이었지만 그것도 채운샘이 다시 더 나아가실 때, 또 걸렸구나 싶은 생각이 든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문명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을 분절해서 우리의 유용성에 맞춰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계에 사용하는 크리스탈은 그 진동수가 정확히 1분에 60번이라는지요. 그러니까 정우샘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우리의 임의적 사용이지만 그것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크리스털이라는 물질의 시간성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채운샘께서 ‘측정도구와 측정하는 자의 의도’를 말씀하실 때 그 물질의 시간성이라는 것에도 이미 인간적 해석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크리스털의 물질성을 ‘자연’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인간적 규모의 이해라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크리스털이라고 이름한 그 물질의 시간성도 현재적 수준의 측정에 걸려든 일부일 수 있지 않나, 라는 의미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의 총합이 아닙니다. 크리스털이라는 실체도 우리가 그것을 크리스털이라고 할 때 존재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대상은 없다' ‘과학도 해석’이라 했던 니체가 또 떠오르네요.
그렇다면, 쉬는 시간에 지안샘과 나눈 대화입니다. 규문 창밖에 핀 노란 달맞이 꽃을 보면서요. 달맞이꽃이 무리져 핀 들판에 달이 뜨면 달맞이꽃들이 일제히 꽃망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대요. 고대인들에게 그 소리가 곧 시간을 알려주는 소리가 아니었까요? 이들에게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천지만물이지 않았을까요. 시계의 초침소리에 맞춰 일상을 꾸리는 우리와 달맞이꽃이 피는 소리가 일상에 스며있는 고대인들의 시간은 전혀 다른 시간이 아닐까요. 후기를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쓰지 않고는 달리 쓸 방도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촉박하고 할 일은 태산이니까요.
난희샘~ 쉬는 시간에 달맞이꽃이 괜히 샘 눈에 포착된 것이 아니란 생각이.. 샘의 후기를 들으면서(샘의 글은 언제나 제게 읽는 동시에 들립니다만^^)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샘의 중세 공부와 우리의 오버레이 텍스트와 그때 규문이라는 시공간의 마주침이 달맞이꽃 포착으로 표현된 것이였군요! 샘께서 요즘 푹 빠지신 공부들이 연결되며 샘솟는 기쁨과 에너지가 마구 피어나는 후기입니다. 감사합니다 😊
2조에서도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심도있는 얘기를 나눴네요.^^ 오버레이에서 다양한 주제와 작품들을 소개해줘서, 토론할 거리가 풍성한 것 같습니다. 근대 이전의 감각과 기호 등을 통해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데요.^^ 샘의 달맞이꽃처럼 우리가 시공간을 포착하는 것들이 많을텐데, 우린 그런걸 그냥 지나가면서 시계나 구글맵 등 추상화된 것으로 인지하는 것 같아요. 오늘 여의도 공원길을 건너면서 활짝 핀 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다니면서 스쳐지나갔던 것들이겠지요. 시공간을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샘의 풍부한 감성이 느껴지는 후기 감사해요.😊
다른 조에서 나눈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같은 내용으로 어떤 얘기들이 나오는지 몸을 3개의 분신으로 나눠 각각 다 들어보고 싶네요.. 하하~ 다행히 후기를 남길수 있는 문자라는 도구가 있어 참 좋습니다.. 시간은 환상이고 입체공간만 보이는 3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개념을 보탠 4차원의 세계를 인지하기란 참 어렵다고 합니다. 동시성의 세계를 기호로 형상화하는 예술의 영역이 어디까지가 그 경계인지 모호하기만 합니다. 오버레이가 우리에게 많은 질문들을 남기지만, 복작대는 지금의 현실에 왠지 모를 편안함과 위로를 주는 느낌은 저만 느낀 걸까요? 구체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난희쌤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ㅋㅋㅋ. 시간은 촉박하고 할 일이 태산이시라니, 시간을 태산처럼 살고계시나 봅니다, 난희샘^^. ‘공간이 아닌 시간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리듬의 문제’라는 난희샘이 알쏭달쏭하다는 말 저도 궁금했는데요. 고대인들에게 체계와 구조는 불가분의 관계였을 것이라고 하는 난희샘의 생각이 무엇인지 더 듣고 싶네요.